유기석 柳基石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유서(柳絮), 유수인(柳樹人), 청원(靑園)
출신지
황해 금천(金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독립장(2008)
주요 활동
1925년 흑기연맹 조직,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와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1932년 톈진 일본군사령부 폭탄 투척, 1944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관련 사건
5·30국민대회, 지린사건, 호서은행사건
관련 조직
충열단, 흥사단, 흑기연맹,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불멸구락부, 한교전지공작대
생애
1905년 1월 21일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합탄면 매후리 대동(垈洞)에서 유찬희(柳讚熙)와 모친 이안라(李安羅)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성부 필운동(현 서울특별시 필운동)이다. 이명으로 유서(柳絮)·유수인(柳樹人)·청원(靑園) 등을 사용하였다. 유기문(柳基文)이 동생이다. 배재학당 출신의 기독교 목회자인 부친을 따라 1911년 강원 이천군(伊川郡)으로 이주하였다. 1913년 중국 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로 이주하여 부친이 설립한 태광학교(太光學校)를 거쳐 창동학교(彰東學校)를 졸업하고, 1918년 옌지도립 제2중학교에 입학하여, 동급생 심용해(沈容海, 일명 沈茹秋)를 만났다. 1919년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간도에서도 3·13 만세시위가 전개될 때, 충열단(忠烈團)에 가담하여 심용해 등과 전단 인쇄와 배부, 태극기 등을 제작하며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부친은 시위를 계획한 대한독립기성총회에서 자금 조달을 맡았으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연설을 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하였다. 1920년 9월 상하이(上海)로 떠나 이동휘(李東輝)·여운형(呂運亨)·안창호(安昌浩) 등의 지도를 받았다. 특히 안창호의 영향을 크게 받아 1920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였다. 이후 난징(南京)의 화중공학(華中公學)에 편입하여 1924년 6월 졸업하였다. 이어 베이징(北京)에 유학하여 9월 차오양대학(朝陽大學)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베이징에서는 흥사단 원동위원부 북경반장을 맡았고, 북경조선인기독교회의 임원과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의 기부금 모금위원, 그리고 북경고려유학생회 체육부 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6월 30일 톈안먼(天安門)에서 열린 5·30학살사건 규탄 국민대회에서 장시간 연설로 명성을 얻었다. 베이징에서 심용해와 재회하면서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 1924년 10월경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흑기연맹(黑旗聯盟)을 조직하고 아나키즘을 연구·선전하였으며, 1925년 봄부터 기관지 『동방잡지(東方雜誌)』를 발행하였다. 1925년 초 국내 기독교 주간지인 『기독신보(基督申報)』에 「묵자(墨子)와 기독(基督)」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묵자의 겸애설과 예수의 애인주의(愛人主義),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이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1925년 말을 전후하여 경제적인 이유로 학업을 포기하였고, 비행사 안창남(安昌男)을 만나 타이위안(太原)에 있던 옌시산(閻錫山) 군대의 비행대에 입대하였다. 1년 뒤인 1927년 1월 안창호의 지린(吉林) 방문을 수행하다가 중국 관헌에 체포되었다가, 중국 요로(要路)에 진정하여 안창호 등과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5년 말부터 1928년에 걸쳐 국내 잡지 『신민』·『동광』과 중국 잡지 등에 소련 공산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을 소개할 만큼 아나키즘에 기울었다. 특히 『민종(民鐘)』 제16기(1926. 12. 15.)에 「동아무정부주의자대연맹의 조직을 주장한다(主張組織東亞無政府主義者大聯盟)」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대 조직 구성을 제의하는 등 아나키즘 이론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광』에 루신(魯迅)의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번역 게재하였다. 또 『약소민족의 혁명방략(弱小民族的革命方略)』(中山書店, 1929. 6)이라는 저서와 『자유사회학(自由社會學)』(중산서점, 1929)이라는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1927년 6월 중국 아나키스트 친왕산(秦望山)의 고향인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를 중심으로 무장자위조직을 만들어 농민들을 조직화시키자는 제의를 하여, 이정규(李丁奎)를 필두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7년 후반부터 약 6개월 동안 샤먼(厦門)과 취안저우 등지에서 한·중·일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활동에 참가하였다. 취안저우에서 상하이로 돌아온 직후부터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체를 결성하는 일에 진력하여 1928년 3월 상하이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共産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고, 같은 해 6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과 협의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28년 10월에는 정내동(鄭來東)·오남기(吳南基) 등과 아나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이튿날』을 간행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며, 또 그해 가을 난창(南昌)의 중국국민당 성(省) 당부에서 일하다가 관련 증명서를 제출하지 못하여 면직되었다는 부인의 회고가 있다. 1929년 봄 난징에서 『동남일보(東南日報)』의 문화면 편집을 수개월간 맡았다가 톈진으로 가서 『천진상보(天津商報)』의 주필을 10여 일 맡았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1929년 전후 중국 동북지방 거주의 한국 농민들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주시켜 허베이성(河北省)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농사와 군사훈련을 하며 항일유격대로 조직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심용해의 권유로 1929년 가을 함께 옌벤(延邊)을 방문하여 농촌개발을 위한 자금 모집에 진력하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여 계획은 무산되었다. 베이징에 돌아와 옌시산 계열의 장인우(張蔭梧) 베이징시장 비서직을 맡았다. 1930년 2월 아나키즘에 동조하던 신현상(申鉉商)이 국내로 들어가 최석영(崔錫榮)과 함께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5만 8천원의 거금을 인출하여, 3월 그를 찾아왔다. 이를 기화로 중국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베이징에 모여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중 5월 초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시 체포되었으나 베이징시 판공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지위를 이용하여, 여러 방면에 도움을 청하여 사건의 직접 관계자인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다른 인사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일제의 정보 보고 가운데에는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이 이와 관련하여 4월 20일 상하이에서 결성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930년 4월 2일 비행기 추락사한 안창남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를 받고 타이위안을 다녀왔으며, 5월에 심용해가 옌벤에서 4월에 암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위의 만류로 옌벤에는 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름에 부친 유찬희가 사망하였다. 1930년 9월 베이징시정부 공무원을 사임하고, 상하이를 거쳐 취안저우로 갔다. 한·중 아나키스트들이 설립한 여명고등중학(黎明高等中學)의 지리교사로 일하며, 체육교사를 겸하기도 하고 교장대리까지 맡았다가, 체포령이 내려 1931년 중반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 학교 재직 시절 동생 유기문(柳基文)과 상봉하였으며, 유기문 역시 아나키스트로 형의 길을 따랐다. 1931년 11월 유자명(柳子明)이 주도한 아나키즘 연구단체인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베이징에서 지방군대와 일부 동북의용군을 재편성한 동북민중항일구국군(東北民衆抗日救國軍)의 별동대 20여 명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1월 이용준(李容俊) 및 동생 유기문과 톈진에서 일본총영사관 관저와 일본군사령부, 일본 기선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에 참여하였다. 1932년 겨울 잉치루안(應起鸞)과 결혼하여 허베이성 장자커우(張家口) 근처 쉬안화(宣化)의 성립(省立) 제2사범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카이펑(開封)에 정착하여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카이펑의 『하남일보(河南日報)』주필로 활동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상하이에서 지하 공작에 참여하며 남화한인청년연맹과 다니 마사유키(谷正之) 일본공사의 암살 시도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상하이를 탈출하여 1938년 쑤베이(蘇北) 지역 중국 유격대에 합류하였으며, 1940년 이후 쑤베이 지역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43년 장쑤성(江蘇省) 상라오(上饒)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의 한국광복군 제1지대 구대와 한국독립당 계열의 제3 징모분처의 대립을 중재하고, 제3전구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를 조직 지도하였다. 1944년 4월 제8차 조선민족혁명당 대회에서 명예주석단의 일원으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광복 후 중한문화협회 동남분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어 1946년 초에는 상하이에서 『중한문화(中韓文化) 편집을 맡았다. 1946년 8월부터 2년간 난퉁학원(南通學院)의 경제학 부교수로 근무했고, 1948년 7월부터는 산둥성(山東省) 칭타오(靑島)의 화베이초연공사(華北草煙公司) 고문으로 1년 가깝게 재직하였다. 1949년 5월 3일 서울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만나고 7월 1일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중국에 돌아와서는 1952년까지는 상하이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1952년 11월 장쑤사범학원(江蘇師範學院) 역사계 교수로 취임하였다. 장쑤사범학원이 쑤저우대학(蘇州大學) 사회학원으로 개편된 이후에도 계속 재직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친북노선을 걸어 북한을 지지하는 논설을 발표하였고, 북한 작가들의 작품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일시 조선노동당의 광저우판사처(廣州辦事處)에 관여하여 북한의 대외선전과 연락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73년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황해도의 친척들을 만났다고 한다. 1950년대부터 한국 역사와 관련된 적지 않은 논문을 발표하거나 번역하였다. 안중근·홍경래, 제국주의의 한국침략 등에 관한 글도 있고, 임진왜란에 관한 논문이 많았다. 그의 사후에 간행된 『중국을 찾아온 조선의 옛사람들』(료녕인민출판사, 1984)과 『임진항왜전쟁(壬辰抗倭戰爭)』(『연변역사연구』 제2집, 연변역사연구소, 1986)이 결실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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