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육삼정 의거 터
위치 정보
주소 (한글)
상해시 홍구구 당고로 346호
주소 (현지)
上海市 虹口區 塘沽路 346号
역사적 의의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이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단하려 했던 곳
설명
육삼정의거는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이 1933년 3월 17일 중국요리점인 ‘육삼정’에서 중국정부 요인 매수를 목적으로 연회를 개최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처단하려 한 사건이었다. 1933년 3월 원심창은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를 중심으로 주중공사 아리요시에게 2천만 불이란 거액을 주어 러허성(熱河省)을 근거로 반만항일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는 의용군과 독립군을 탄압하려는 정보를 입수했다. 또한 아리요시가 국민정부 내 고급 장성(將星)을 매수하고자 상하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六三亭)이란 고급 요리점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것도 알아냈다.
육삼정의거를 주도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1930년 유기석·장도선 등 아나키스트들이 적 기관 파괴 및 요인 처단 등을 목표로 조직한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여하여 활동했었다. 이후 이들은 한중일(韓中日)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전선 조직인 항일구국연맹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결성된 항일구국연맹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이회영·백정기 등 7명과 중국측 왕야차오(王亞樵)와 화쥔스(華均實) 등 7명, 일본측 사노 이치로(佐野一郞)등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1933년 3월 5일 아리요시가 상하이 공동조계에 방문한다는 정보를 토대로 항일구국연맹 인사 정화암·원심창·엄순봉·이강훈·이달·박기성·정해리·야타베(失田夫) 등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이 중심이 되어 아리요시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육삼정의거에 사용할 폭탄은 윤봉길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거 당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훙커우공원의거 이후 김구가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으로 이동할 때 오면직에게 맡긴 것이었다. 이와 함께 중국인 왕야차오와 화쥔스가 마련한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 1개도 받았다.
1933년 3월 9일 아리요시의 모임장소가 훙커우 소재 요리점 육삼정인 것과 차량의 번호가 4684와 6743인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3월 12일 원심창과 야타베가 현장을 답사하였고, 13일 밤 백정기와 이강훈이 거사현장이 될 곳을 돌아본 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육삼정에서 나와서 아라요시가 전용차를 타는 순간 폭탄을 던지기로 하여 이강훈이 먼저 도시락형 폭탄을 던져 경호원부터 처리하고 다음 백정기가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저항이 있을 경우 각자가 휴대한 권총을 가지고 대응하며 도주하고 집결 지점에서 만나 탈주하고 남은 동지들과 연락하기로 했다. 또한 대기 장소는 육삼정에서 약 200m 떨어진 우창로(武昌路) 소재 중국 요리점 송강춘으로 정했다. 그러나 의거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송강춘에서 백정기와 이강훈이 붙잡혔고 원심창은 망을 보다가 함께 일제 경찰에게 피체됐다.
백정기와 원심창은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이강훈과 원심창은 광복 후 석방되었으나 백정기는 1934년 6월 5일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여 광복 후 윤봉길·이봉창 의사와 함께 1946년 국내로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육삼정의거를 주도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1930년 유기석·장도선 등 아나키스트들이 적 기관 파괴 및 요인 처단 등을 목표로 조직한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여하여 활동했었다. 이후 이들은 한중일(韓中日)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전선 조직인 항일구국연맹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31년 결성된 항일구국연맹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이회영·백정기 등 7명과 중국측 왕야차오(王亞樵)와 화쥔스(華均實) 등 7명, 일본측 사노 이치로(佐野一郞)등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1933년 3월 5일 아리요시가 상하이 공동조계에 방문한다는 정보를 토대로 항일구국연맹 인사 정화암·원심창·엄순봉·이강훈·이달·박기성·정해리·야타베(失田夫) 등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이 중심이 되어 아리요시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육삼정의거에 사용할 폭탄은 윤봉길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거 당시 사용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훙커우공원의거 이후 김구가 상하이를 떠나 자싱(嘉興)으로 이동할 때 오면직에게 맡긴 것이었다. 이와 함께 중국인 왕야차오와 화쥔스가 마련한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 1개도 받았다.
1933년 3월 9일 아리요시의 모임장소가 훙커우 소재 요리점 육삼정인 것과 차량의 번호가 4684와 6743인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3월 12일 원심창과 야타베가 현장을 답사하였고, 13일 밤 백정기와 이강훈이 거사현장이 될 곳을 돌아본 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육삼정에서 나와서 아라요시가 전용차를 타는 순간 폭탄을 던지기로 하여 이강훈이 먼저 도시락형 폭탄을 던져 경호원부터 처리하고 다음 백정기가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었다. 저항이 있을 경우 각자가 휴대한 권총을 가지고 대응하며 도주하고 집결 지점에서 만나 탈주하고 남은 동지들과 연락하기로 했다. 또한 대기 장소는 육삼정에서 약 200m 떨어진 우창로(武昌路) 소재 중국 요리점 송강춘으로 정했다. 그러나 의거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송강춘에서 백정기와 이강훈이 붙잡혔고 원심창은 망을 보다가 함께 일제 경찰에게 피체됐다.
백정기와 원심창은 나가사키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고,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이강훈과 원심창은 광복 후 석방되었으나 백정기는 1934년 6월 5일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여 광복 후 윤봉길·이봉창 의사와 함께 1946년 국내로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