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근 韓鳳根

중국방면 독립장(198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청주(淸州)
출신지
경남 밀양(密陽)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독립장(1980)

주요 활동

의열단의 창립 멤버이자 그 간부로서 중국 상해에서 의열투쟁을 위한 무기와 폭탄의 공급, 의열 투쟁의 계획과 실행 등에 꾸준히 관여함.

관련 사건

의열단, 의열투쟁, 김창숙사건, 밀양폭탄사건

관련 조직

의열단

생애

1894년 10월 23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밀양면(密陽面) 가곡리(駕谷里)에서 아버지 한춘서(韓春瑞)와 어머니 김해옥(金海玉)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동생 봉인(鳳仁)과 봉삼(鳳三)도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국내에서의 운동에 곤란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만주(滿洲)와 서간도(西間道), 노령(露領) 등지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과 무기조달, 군자금 마련 등에 힘쓰는 한편, 국내외 무장 투쟁과 연동하여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독립운동방략 등에서 의견이 엇갈리자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일제 기관의 폭파와 파괴, 일제 요인 암살, 친일파와 밀정 암살 등을 주된 목표로 삼고 의열투쟁을 진행하였다. 일찍이 만주 지역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1919년 11월 조선의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설립되어 기존의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 노선을 비판하여 급진적인 투쟁을 전개한 의열단의 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창립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김원봉(金元鳳)·신철휴(申喆休) 등과 상의하여 폭탄·권총·탄약 등을 입수하는 데 노력하였다. 같은 해 3월 중순부터 폭탄과 권총을 상하이의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로부터 다롄(大連)을 거쳐 경남 밀양의 김병완(金炳完)에게 밀반입시키는 계획에 개입하였다. 5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관계자가 붙잡히는 등 당시 ‘밀양폭탄사건’의 관계자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1923년 12월 유석현(柳錫鉉)·남영보(南寧保)·이현준(李賢俊) 등과 함께 필요한 폭탄과 무기를 서울로 반입하려 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925년에도 폭탄과 무기를 조선 내로 들여오려는 노력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1월 상하이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와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간의 마찰이 벌어지자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이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26년 [음]3월 중순 김창숙(金昌淑)이 상하이로 도항하여 의열단과 그 간부에 접촉하여 국내 유림과 부호 등이 모금한 3,000여 원을 공급하자, 폭탄 3개와 권총 7정, 실탄 490발 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유우근(柳友槿)·이승춘(李承春)·나석주(羅錫疇) 등과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폭파를 추진하였다. 나석주의 국내 도항과 잠입을 도와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는 데 일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별책2, 2009. ; 朝鮮總督府 警務局,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1934. ; 국가보훈처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ⅩⅦ) : 日本篇(5)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 要視察人名簿』, 1996. ; 『동아일보』, 1925. 1. 9, 1926. 11. 11, 1928. 8. 9. ; 『조선일보』, 1924. 5. 8·9, 1925. 1. 9, 8. 29, 1926. 12. 21, 1928. 10. 2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1·12, 1976·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7권,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