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승 趙南升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풍양(豊壤)
이명(별칭)
조일운(趙一雲), 조국광(趙國光)
출신지
경기 양주(楊州)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애족장(2010)
주요 활동
중한호조사 참여, 한국유일독립당북경촉성회 집행위원
관련 사건
을사늑약
관련 조직
중한호조사, 북경한교동지회, 반제국주의운동대연맹회, 한국유일독립당북경촉성회
생애
1882년 4월 28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진건면(眞乾面) 사릉리(思陵里)에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외손자이며, 순종(純宗)의 이종사촌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이명은 조일운(趙一雲)·조국광(趙國光)이다. 아버지는 궁내부 협판, 평식원 총재, 의정부 찬정을 역임한 조정구(趙鼎九)이며, 어머니는 흥선대원군과 영흥부대부인 민씨(閔氏)의 둘째 딸인 이씨(李氏)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趙秉世) 등 49명과 을사늑약을 조인한 박제순(朴齊純) 등을 처형하고, 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을 상소하였다. 1918년 이회영(李會榮)이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며 국내에 잠입할 때 도움을 주었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항일활동에 참여하여, 재북경요시찰인으로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21년 3월 1일 베이징 박정래(朴貞來)의 집에서 열린 3·1운동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신채호 등 16명과 “독립기념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선전부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1923년 6월 박용만(朴容萬)·이회영·김창숙(金昌淑) 등과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7월 베이징에서 신숙(申肅)·원세훈(元世勳) 등과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조직에 앞장섰으며, 규칙기초위원·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8월 반제국주의운동대연맹회(反帝國主義運動大聯盟會)가 성립되자 이세영(李世永)·박숭병(朴嵩秉)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전권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북경한교동지회 실행위원이 되어 러일협약의 성립에 따른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해 6월에는 베이징에서 영일동맹 배척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한흥(韓興)·원세훈·서왈보(徐曰甫) 등과 ‘중국 국민의 구국구족(救國救族) 운동에 즈음하여 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라는 인쇄물을 배포하였다. 내용은 “중국과 한국이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하자”, “국내·외의 각종 사회 및 각 단체와 한국민족 운동 단체가 연합 합작할 뜻을 표시하여 중국 국민운동에 대하여 정신 및 물질적으로 응원을 할 것” 등이었다. 1926년 안창호가 제안한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에 찬성하여 한국유일독립당북경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北京促成會) 창립에 앞장섰으며,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2월 국내로 들어오다가 인천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고,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어 2월 27일 기소되었다. 같은 해 3월 4일 공판에서 ‘베이징에 가서 사회운동을 한 이유는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해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47, 1906. 4. 20. ; 『고종실록』 48, 1907. 1. 22. ; 「北京在留 朝鮮人 狀況 報告의 件」, 1916. 12. 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1』. ; 「獨立紀念日에서의 鮮人의 行動 報告의 件」, 1921. 3. 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1』. ; 『동아일보』, 1924. 8. 25, 1932. 2. 28, 3. 5. ; 『신한민보』, 1924. 12. 25. ; 『매일신보』, 1932. 3. 5. ; 『조선일보』, 1933. 6. 2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7·9, 1973·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