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암 鄭華岩

중국방면 독립장(198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동래(東萊)
이명(별칭)
자: 윤옥(允玉), 호: 화암(華岩), 본명: 정현섭(鄭賢燮)
출신지
전북 김제(金堤)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독립장(1983)

주요 활동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및 기관지 『정의공보』·『탈환』 편집, 193년 남화한인청년연맹 조직, 1931년 항일구국연맹 및 흑색공포단 조직, 1933년 상해해방연맹 조직 및 육삼정 의거 참여, 1936년 남화한인청년연맹 기관지 『남화통신』 발행 및 맹혈단 조직, 1937년 중한청년연합회 설립 및 『항쟁시보』 발간 등

관련 사건

육삼정 의거, 상해거류민회장 처단 의거

관련 조직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남화한인청년연맹, 항일구국연맹, 흑색공포단, 상해해방연맹, 맹혈단, 중한청년연합회

생애

1896년 9월 14일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월촌면(月村面) 장화리(長華里)에서 정환전(鄭桓全)과 진주 강씨(姜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윤옥(允玉)이고, 호는 화암(華岩)이다. 본명은 정현섭(鄭賢燮)이다. 외조부인 강흔계(姜昕系)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봉준과 활동하였다. 1914년까지 고향에서 한문을 배웠다. 1919년 고종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전북 부안군 줄포(茁浦)에 살던 안인목(安仁穆)과 줄포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을 피해 전주(全州)로 옮겨, 백남규(白南奎)·정봉수(鄭鳳洙) 등과 독립운동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그해 6월 이기순(李基順)을 중국 상하이(上海)로 보냈다. 두 달 후 귀국한 이기순과 함께 같은 해 11월경 상경하여 이정규(李丁奎)·양기탁(梁起鐸)·이종락(李鍾洛)·이종욱(李鍾郁) 등을 만났다. 1920년 이종욱이 주도한 독판부(督辦府) 조직에 참여하였고, 그해 8월 초 미국 의원단 방한에 맞춰 서울에서 전개된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끌려갔지만, 상인으로 위장해 다음날 풀려나 인천으로 옮겼다. 1921년 진수린(陳壽麟)·이종락·최익수·이을규(李乙奎)·이정규와 중국으로 가기로 계획하고, 이종락과 신의주와 중국 안둥(安東)·펑톈(奉天)·톈진(天津)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대동여사(大同旅舍)에서 지내면서 손두환(孫斗煥)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함께 망명하였던 이종락이 사망하자 정안사(靜安寺) 외국인 묘지에 장사지냈다. 미국이나 러시아행을 고심하다가 ‘공산당 입당 후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극동근로자대회에 참석하면 원동대학(遠東大學)에 입학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을규·이정규와 함께 러시아로 가기로 결정한 후 여운형을 만났고, 김만겸(金萬謙)과 상의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어서 이을규·이정규와 더불어 김만겸으로부터 자세한 설명과 노정표 등을 받아 베이징(北京)으로 이동하였지만, 10월경 유자명(柳子明)을 만나 러시아행을 포기하였다. 유자명의 소개로 후고루원(後鼓樓園) 소경창호동(小經廠胡洞)에 거주하던 이회영(李會榮)을 만났고, 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조남신(趙南信)·이천민(李天民) 등과 교류하였다. 1921년 12월 이회영과 톈진과 베이징 사이에 위치한 영정하(永丁河)에서 토지 개간사업을 추진키로 하고, 귀국하여 자금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8월 초 이자경(李慈卿)·나혜석(羅蕙錫)의 도움을 받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해 9월 중국 동지인 첸한광(陳韓光)과 협의하여 후난성(湖南省) 한수이현(漢水縣) 양도촌(洋濤村)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을규·이정규·백정기(白貞基)와 함께 김창숙의 요청 등으로 모아호동(帽兒胡洞)의 부호 고명복 일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4년 4월 말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이회영·이을규·이정규·백정기·유자명과 더불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결성하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9호까지 발행하였다. 그해 9월 이후 이을규·이정규·백정기와 상하이로 옮겼고, 1928년 『정의공보』의 제호를 『탈환』으로 변경 속간하였다. 1924년 11월 상하이에서 영국인 경영 철공장에 근무하면서, 김원봉과 친분이 두터웠던 유태계 독일인 마첼로부터 폭탄제조 기술을 배웠다. 여공 사망사건을 계기로 철공장을 그만둔 후 피압박민족의 권리회복을 위해 노동운동을 시작하였고, 화남아나키스트연맹과 상해공단연합회 등의 단체와 협력하였다. 1925년 5월 상하이에서 일본과 영국 기업에 맞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동참하였다. 그해 겨울 이정규·백정기·이기연·이상일(李上日)과 함께 톈진(天津)으로 이주해 프랑스조계에 거주하던 이회영과 재회하였다. 이후 베이징과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27년 7월 백정기로부터 ‘이을규·이정규가 농민자위운동을 위해 취안저우로 갔으니 함께 가보자’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당시 취안저우에는 외부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을규·이정규·이기환·유기석 등이 중국인 친왕산(秦望山), 일본인 아카가와(赤川啓來)·이와사(岩佐作太郞) 등과 함께 민단 자위단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었다. 1928년 지난(濟南)에서 많은 중국인이 일제에 학살되면서 일본제품 배척운동이 전개되자,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여 마오이보(毛一波)·첸광궈(陳光國)와 논의하였다. 이을규 등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전단을 만들어 지난사건(濟南事件)의 진상을 알리고, 일본 물품의 불매와 배척이 바로 항일의 요체임을 강조하는 연설 등을 통해 동참하였다. 1929년 국립상해노동대학에서 약 1년간 노동문제를 연구하였다. 그해 11월 다시 취안저우로 가서 학교와 사회단체 등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중국 침략 등에 관한 강연을 통해 후원금 1,800원을 모집하였다. 1930년 2월 오면직·김동우 등과 상하이로 이동해 백정기를 만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국내 호서은행에서 58,000원을 인출한 후 베이징으로 온 신현상·최석영과 만나 김구와의 면담을 논의하였다. 그해 5월 1일 일본영사관 소속 경찰들의 급습을 받아 신현상·최석영 등이 붙잡히고 자금도 압수당하였다. 같은 해 9월 초 이을규가 톈진 부두에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면서 활동이 위축되고 자금난도 가중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동료들과 일본조계 욱가(旭街)에서 중일합작회사로 운영되던 정실은호(正實銀號)의 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운반책임을 맡고 확보한 자금을 무사히 옮겼다. 그해 김좌진의 사망을 계기로 백정기·이을규·김종진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에 대한 물적·인적 지원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같은 해 4월 이회영·백정기·유자명·유서(柳恕)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산하단체로 남화구락부(南華俱樂部)를 두고 기관지인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하였다. 10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회의에 참석해 만주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동지들과 하이린(海林)으로 이동을 결의하고 3개 조로 나누어 옮겼다. 하이린에서는 한족총연합회와 연합해 농한기를 이용해 이주한인들에게 사상계몽과 생활개선 관련 강의 등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시작되자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그해 10월 말 항일공동전선을 제안하기 위해 찾아온 중국인 왕야차오(王亞樵)·화쥔스(華均實) 등과 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한국 측 7명, 중국 측 9명, 일본 측 전화민(田華民)·오세민(吳世民) 등과 더불어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적 기관파괴·요인암살·친일분자 제거·항일선전 등을 목적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이회영과 함께 지휘하였다. 1932년 10월 백정기·이달(李達)·원심창(元心昌)·오면직(吳冕稙) 등과 이회영 체포와 관련된 밀고자 이규서(李圭瑞)·연충렬(延忠烈)을 처단하였다. 11월 하순 상하이 조계지에서 동료들과 베이징 등 화베이(華北)지역의 일제 경찰 공격, 톈진총영사관 폭탄 투척, 베이징 일본주둔군 사령부 폭탄 투척 등을 계획하였다. 1933년 2월 상하이 우창로(武昌路)에 위치한 육삼정(六三亭)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 등이 중국 군벌과 회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월 17일 오후 9시 거사키로 계획하였다. 3월 5일 백정기의 집에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이 실행하기로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그해 8월 상하이에서 엄순봉 등과 밀정 옥관빈 처단을 실행하였다. 1935년 3월 이달·이규호와 상하이에서 친일파로 알려진 이용로를 처단하였다. 1936년 중국인 소설가이자 아나키스트 바진(巴金)과 교류하였고, 문화생활출판사(文化生活出版社)를 중심으로 중국인들과의 교류하였다. 1940년 이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푸젠성(福建省)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한국광복군 현지 책임자로서 연합군 포로 구출, 미·영 포로수용소 위치 파악, 일본군 수송로 폭파 등을 수행하였고, 일본군 소속 한인 학도병 탈출 공작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 상하이의 한인인성학교(韓人仁成學校) 이사장과 상하이교민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京高特秘 제1120호 無政府主義者 李容俊 取調의 건」, 1939. 4. 27, 『思想에 關한 情報綴 4』. ;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 서간도시종기』, 정음사, 197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7권, 1976. ;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자유문고, 1982. ;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화상』, 민음사, 1988. ;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 김명섭, 『이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 국가보훈처 편, 『三十年放浪記-유기석 회고록』, 2010. ; 박걸순, 『류자명』,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