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趙明河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함안(咸安)
이명(별칭)
풍천명하(豊川明河)
출신지
황해 송화(松禾)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독립장(1963)
주요 활동
일왕의 장인이자 육군대신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척살 시도
관련 사건
구니노미야 척살
생애
1905년 4월 4일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하리면(下里面) 장천리(長泉里)에서 아버지 조용우(趙鏞禹)의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일제의 강요로 풍천명하(豊川明河)라는 창씨명을 썼다. 6세 때 송화군 풍해면(豊海面)에 거주하는 한학자 김삼풍(金三豊)에게 3년간 한학을 배웠다. 1914년 풍천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6년 송화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20년 3월 송화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다가, 1924년 9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송화읍의 공의(公醫) 김윤희(金允熙) 밑에서 약국생으로 일하였다. 또 송화읍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조용기(趙鏞基) 집에 유숙하면서 한약 조제와 처방을 습득하였다. 이후 황해도 신천군청 지방서기 임용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이때 일제의 식민지배를 체험하였고, 독립의 신념을 확립하게 되었다. 1926년 9월 신천군청 서기직을 사직하고, 10월 17일 고향을 떠나 22일 일본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였다. 건전지공장과 메리야스공장 잡역부로 일하며, 야간에 상공학교(商工學校)·상공전수학교(商工專修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일본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명하풍웅(明河豊雄)이라는 일본인 행세를 하였으나, 식민지인으로서의 민족적 차별을 직시하게 되었다. 이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가기 위한 기착지로 타이완행을 결심하였다. 1927년 11월 7일 타이완 지룽항(基隆港)에 도착한 후 타이베이(臺北)를 거쳐 타이중(臺中)에 정착하였다. 부귀원(富貴園)에 근무하면서 차 배달을 하였고, 차 농장에서 일하면서 타이완인 장톈디(張天弟)에게 검도를 배웠다. 일왕의 장인이며 황족인 육군대신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가 일본군 검열을 위해 타이완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상하이행을 포기하고 타이중에서 구니노미야를 처단키로 결심하고, 구니노미야의 동정을 예의주시하던 중, 1928년 5월 13일 타이중에 있는 일본군을 검열하고 타이중(臺中) 주지사 관저에서 숙박한 후 다음날 타이중역에서 타이베이로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구니노미야가 탄 무개차가 움직이는 동선을 미리 답사하고, 차가 서행하는 커브길인 타이중 주립도서관 앞에서 구니노미야를 척살할 계획을 세웠다. 5월 12일 구니노미야가 타이중에 도착하여 현지 주둔 3대대에 대한 검열을 마치고 당시 타이완총독인 가미야마 만노신(上山滿之進)과 명승지인 아리산(阿里山)을 관광하였다. 일정을 마친 구니노미야는 타이베이로 가기 위해 5월 14일 숙소인 지사 관저를 출발 타이중역으로 가는 도중, 타이중 주립도서관 앞에서 단독으로 의거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환영인파와 거리 측정, 속도와의 관계 설정 등이 미숙하여 척살에 실패하였다. 구니노미야의 자동차가 타이중 주립도서관을 통과할 때 단도를 들고 자동차에 올라타려 하였으나 속도가 빨라 위해를 가하지 못하였다. 바로 단도를 구니노미야에게 던졌으나 운전수의 손에 상처만을 입혔다. 현장에서 붙잡혀 타이중경찰서로 압송되었으나, 모르핀을 삼킨 탓에 첫날부터 취조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4일간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5월 19일 상태가 호전되어 타이중형무소 독방에 수감되었다. 타이완총독부에서는 공모자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5월 15일 모르핀을 삼켜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진행된 취조 과정에서 고향 친구들인 오두식(吳斗植)과 김병렬(金炳烈)의 이름을 말하였다. 타이완총독부에서는 조선총독부에 협조를 요청하여 황해도 송화군과 신천군에 연루자를 찾기 위해 일제 경찰을 파견하였다. 또한 타이중시 초음정(初音町)·오정목(吳町目)·최승한(崔承翰)의 집을 수색하여 연루자의 흔적을 찾고자 하였지만 무위로 끝났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총독부에서는 5월 8일 단재 신채호(申采浩)가 지룽항에 도착한 후 지룽우체국에서 위폐를 교체하다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구니노미야 척살 의거를 연계시키려 하였다. 타이완총독부는 일명 ‘타이중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 재판 과정을 최소화하였다. 6월 13일 타이완 법정에서 5명의 법관이 사건 심리를 끝내고 다음날 사건 실상이 발표되었다. 6월 14일에는 가미야마 타이완총독을 비롯하여 고토 후미오(後藤文夫) 총무장관, 다나까(田中) 군사령관의 담화가 잇따라 발표되었다. 7월 18일 타이베이고등법원에서 이른바 형법 제75조의 ‘황족에 대하여 위해를 가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위해를 가하려고 한 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라는 조항으로 사형을 받고, 10월 10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宋相燾, 『騎驢隨筆』(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料叢書』 2, 1971). ; 『동아일보』, 1928. 6. 15·18, 7. 19·20, 10. 12, 1932. 4. 5. ; 『중외일보』, 1928. 6. 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 조경래, 『조명하 의사 약전』, 조명하의사기념사업회, 1987. ; 김주용, 「식민지 대만과 趙明河의 의열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0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