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 金鍾壽

학생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전남 장성(長城)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28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조선개척사사건 관련 동맹퇴학에 참여했으며, 1931년 수원 서둔리 화서야학원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함

관련 사건

수원고농사건

관련 조직

조선개척사, 화서야학원

생애

1909년 2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서삼면(西三面) 장산리(莊山里)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 3월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高敞高等普通學校; 현 고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병합, 이하 수원고농) 농과(農科)에 입학하였다. 1928년 9월 17일 수원고농 학교 측은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 사건으로 붙잡힌 본교생 11명이 수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자 출학(黜學)(학적에서 제명함)과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이 조치에 대하여 한국인 학생 46명이 확정판결이 나기 전 학교 측이 출학 처분을 내린 것 등에 항의하여 9월 21일 동맹퇴학을 단행하였다. 이때 동맹퇴학에 참여하였다가 1928년 10월에 학교 측으로부터 출학 처분을 당하였다. 1929년 4월 재입학을 허가 받아 학업에 복귀하였고, 1932년 2월 수원고농을 졸업하였다. 졸업에 앞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적이 있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2년 12월 1일 전남 순천군(順天郡) 농회 기수(技手) 지도원으로 채용되었고, 이어 전라남도 지방산업 기수로 임명되어 1935년 11월까지 장성군(長城郡)에서 근무하였다. 1931년 11월부터 졸업하기 전인 1932년 2월까지 학교 인근인 수원군 일형면(日荊面) 서둔리(西屯里)(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 위치한 화서야학원(華西夜學院)에서 야학교사 이연산(李連山)·조만원(趙萬元)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은 “한국을 일본 제국의 기반으로부터 이탈시켜 국체를 변혁하고 조선 내에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학생들에게 선전하여 장래 혁명투사로 지도, 훈련할 것”을 협의하였다. 화서야학원은 학교가 멀고 경제적 이유 때문에 취학하지 못한 이 지역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둔리 일대의 유지들이 수원고농 학생의 지원을 받아 1927년 설립한 야학교이다. 그 후 1932년 3월 상순 무렵에는 수원고농 학생 이용필(李容泌)과 최홍기(崔弘基)를 화서야학원의 교사 이연산과 조만원에게 소개하였는데, 이후 이용필과 최홍기는 수원고농 취사부의 기금 일부를 1년 1회씩 화서야학원에 기부하도록 하였다. 한편 이용필, 최홍기 등은 1933년 10월 상순 수원고농 안에 독서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 이론 연구와 선전, 동지 획득 등 여러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 독서회는 1934년 3월 이용필 등이 졸업한 후에도 후배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졸업 후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농회 기수로 근무하던 이용필이 1935년 여름 일제 경찰에 붙잡혀 독서회 조직이 드러났다. 이용필이 붙잡힌 그 해 11월에 마찬가지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기소되었다. 1936년 7월 1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이 종결되어 정식재판에 회부되었다. 1936년 11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자 항소하였다. 1937년 4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확정 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7. 4. 12. ; 『동아일보』, 1928. 9. 18·22,1936. 7. 3. ; 『조선일보』, 1936. 7. 3, 10. 1·21, 11. 27. ; 『매일신보』, 1936. 11. 2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조성운, 「일제하 수원고농의 학생운동과 상록수운동」, 『경주사학』 14, 1995. ; 이현희, 「수원고농학생의 항일투쟁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1,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