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규 鄭燦圭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전남 화순(和順)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건국포장(1993)
주요 활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 참여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생애
1913년 5월 6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도림면(道林面) 송죽리(松竹里)에서 태어났다. 1929년 11월 목포공립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光州)에서 일어난 학생시위에서 한국인 학생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동급생인 최창호(崔昌鎬)·권영욱(權永郁)·오상록(吳上祿)·박종식(朴鍾殖) 등과 함께 11월 7일 목포(木浦) 북교동(北橋洞)에 위치한 이상원(李尙源)의 집에서 모여 해당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합의하였다. 진상을 조사한 결과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일제 경찰의 탄압은 민족차별에 의한 편파적이고 가혹한 처벌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11월 14일 최창호·박흥복(朴興福)·권영욱·양재용(梁在容)이 이인형(李麟炯)의 집에 재차 모여 협의한 결과, 11월 19일을 기하여 한국인 학생 전부를 규합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1월 16일 목포 시내 시위에 관한 방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박상준(朴相俊)·임성춘(林晟春)·백상휴(白相烋)·박종식·이재실(李在實)·박사배(朴仕培) 등과 함께 이광우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시위대를 각각 3대로 나누어 2대는 학교 앞, 1대는 송도공원(松島公園)에 모이기로 결의하는 한편, 진정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결행하기로 합의하였다. 11월 19일 아침 자택에서 박상준과 함께 ‘이천만 피압박 민중 여러분’, ‘싸우자 우리 전(全) 피압박 민중’, ‘싸우자, 싸우자, 싸우자’라는 제목의 격문 약 1,500장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교부하였다. 이 격문에는 ‘압제자의 비인간적 폭압과 전제 정치의 정체가 이제 또한 드러났다. 우리들은 광주 학생의 석방을 요구함과 동시에 참기 어려운 피와 눈물의 시위운동을 하는 것이다’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11월 19일 오후 1시경 이인형·박종식·임성춘·박상준·이재실 등은 같은 학교 학생 50여 명과 함께 목포 대성동(大成洞)에 위치한 정명여학교 앞에 집결하여 붉은 목면의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양동(陽洞)·남교동(南橋洞)·무안통(務安通)을 지나 목포역까지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제히 소형 깃발을 흔들고 격문을 배포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자.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행진하였다. 이때 이광우·오상록·조창섭(趙昌燮)과 함께 목포 송도공원으로 가서 학생들에게 격문을 배포하며 동지의 집합을 기다리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차 징역 8월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30. 2. 24.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0. 6. 21. ; 『동아일보』, 1930. 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