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 金鶴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함북 회령(會寧)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애족장(2002)
주요 활동
1920년 의군부 장교로 봉오동전투 참전
관련 사건
봉오동전투, 자유시사변
관련 조직
의군부, 대한의용군
생애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출신이며, 자료에 따르면 189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유년시절의 행적과 북간도로 이주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919년 연해주에서 조직되어 허재욱(許在旭)[허영장(許領將)]의 지휘 아래 북간도로 파견된 의군부(義軍府)의 장교가 되었다. 의군부는 1920년 6월 7일 홍범도(洪範圖) 부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軍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이 통합하여 결성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연합하여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는데 함께 하였다. 봉오동전투에 참전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19년부터 의군부 장교였음을 볼 때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봉오동전투 이후 의군부는 홍범도 부대와 갈라져 1920년 9월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함께 동녕현(東寧縣)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의군부와 군무도독부는 몇 차례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치른 후 그 해 12월 밀산(密山)에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 원동 연해주 이만(Иман)에 도착하였다. 그 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아무르주 자유시(自由市, Свободный)로 옮겨가, 간도와 연해주 한인 독립군부대의 통합군단인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가담하였다. 대한의용군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李東輝)의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창설된 통합 한인 무장부대였다. 이동휘의 독립전쟁론은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元年)’으로 선포하고,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여 대규모 독립군단을 조성해 일본과 독립전쟁을 치르고자 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비밀협정을 체결한 후 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을 자유시로 집결시켰다. 간도에서는 홍범도 부대와 안무의 국민회군, 북로군정서 군대가, 연해주에서는 박일리야의 니항군대(일명 사할린부대)와 이만군대, 다반군대, 독립단 군대 등이 자유시로 이동해 왔다. 이와 함께 자유시에 주둔하고 있던 한인자유대대도 한인부대통합운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3월 중순 경 자유시 인근 마자노보(Мазаново)에서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모인 독립군 부대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한의병대회(全韓義兵大會)’가 개최되었다. 그 결과 2,000명에 달하는 통합부대로서 대한의용군(사할린특립의용대)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 창설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오하묵(吳夏黙) 등이 반발하면서,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하였다. 오하묵 등 자유대대 지도자들은 원동 지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혁명운동을 총지휘하기 위해 1921년 1월에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에서 조직되었던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에 항의하였다. 당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한인사회당과 대척하고 있던 연해주 4월 참변 이후 아무르주로 이동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지도부 인사들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한인사회당의 큰 영향을 받는 대한의용군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새롭게 창설하였다. 1921년 6월 6일 소비에트 러시아 적군 5군단 산하 카자크 기병 600명과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부대 600명을 이끌고 자유시로 온 칼란다리쉬빌리(Н.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성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 결과 한인부대 통합의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다. 간도에서 온 홍범도와 안무, 최진동 등은 고려혁명군을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고,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이후 대한의용군의 나머지 부대들도 마자노보에서 자유시 외곽의 수라세프카 평원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의군부는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고, 수라세프카에 주둔하였다. 이어 6월 19일 군간부 전체회의가 소집되어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을 축소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고려혁명군 편제명령서가 6월 26일 발표되자, 통합은 다시 어려움에 부딪혔다. 편제를 둘러싼 고려혁명군 지도부에 대한 전력 시비로 인하여 갈등이 깊어졌고, 몇 차례 권고와 타협을 시도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위원장 칼란다리쉬빌리는 결국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요청에 따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자유시 수비대 29연대는 수라세프카 평원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무장해제 요청 끝에 오후 2시 20분 무장해제 작전이 실시되었다. 해가 질 무렵에 이르러 강제적인 무장해제가 완료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는데, 대한의용군 측에서는 400~6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고, 고려혁명군은 사망, 도망, 행방불명을 합쳐 약 130명의 피해가 있었다고 공포하였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부대가 의군부였다. 무장해제 결과 대한의용군 포로는 864명에 달하였다. 고려혁명군은 이들 중 죄질이 무겁다고 인정받은 50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 중 장교 72명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였다.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장교 72명에 대한 재판은 11월까지 계속되어, 11월 30일 50명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3명은 징역 2년, 5명은 징역 1년, 24명에게 집행유예 1년, 방면 27명이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3명은 대한의용군의 사령관을 역임한 그리고리예프와 김민선(金敏善) 그리고 독립단 부대의 지휘관 최성학(崔聲學)(최파벨)이었다. 징역 1년을 받은 5명 역시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었다. 압송된 장교는 72명이었는데, 이 중 50명만이 판결을 받았다. 이는 압송 과정 중 일부 인사들이 탈출을 시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르쿠츠크로 압송되는 도중 열차에서 탈출을 시도한 일부는 성공하였지만, 일부는 이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후 감옥에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장교들도 있었다. 자유시참변 이후 1921년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어, 그 해 11월 30일 최종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 기간 중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붉은 군사』 제2호, 1921. 12. 24. ; 『조선일보』, 1923. 6. 24.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1921. 8(김준엽, 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자료편』 2권,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9). ;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