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희 韓定熙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한두희(韓斗熙)
출신지
충남 청양(靑陽)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5)
주요 활동
1932년 좌익협의회와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 조직
관련 사건
예산농업학교 적색사건(예산농교사건)
관련 조직
좌익협의회,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토요회)
생애
1913년 10월 20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 현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興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두희(韓斗熙)이다. 1932년 좌익협의회와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31년 12월 예산공립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공산주의 연구를 시작하였다. 1932년 5월 1일 강봉주(姜鳳柱)·정종호(鄭鍾浩)의 요청을 받아 김규환(金奎煥)·오일규(吳日圭)와 함께 충남 예산군(禮山郡) 예산면(禮山面)에 위치한 금오산 정상에서 일제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무산계급 독재를 경영하여 공산주의에 기초한 사회를 실현할 목적으로 좌익협의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강봉주와 함께 공산주의의 이론과 투쟁방법의 연구를 담당하는 연구부를 맡기로 하였다. 그해 5월 14일과 22일 예산군 예산면 신촌리(新村里) 밤나무 숲과 6월 상순 강봉주의 집에 모여 단체의 확대·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동지 추가 모집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7월 김규환과 오일규가 예산공립농업학교 동맹휴교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퇴학처분을 받으면서 좌익협의회는 해체되었다. 단체의 재조직을 위해 남은 동지들과 논의한 뒤, 같은 해 9월 17일경 자택에서 조직 준비를 합의하고, 박정순(朴正淳)·박희남(朴凞南)에게도 참가를 요구하였다. 다음날 다시 자택에 모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무산계급독재를 경영하여 공산주의에 기초한 사회를 실현할 목적으로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이후 토요회로 개칭)을 조직하고, ‘우리는 전투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을 연구하고 투쟁한다’를 강령으로 결정하였다. 이때 강봉주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이론과 투쟁방법의 연구를 담당하는 연구부를 맡았다. 그해 10월 10일 경부터 11월 중순까지 6회에 걸쳐 자택이나 금오산 중턱에 모여 단체의 확대와 강화를 위해 동지를 더 모으기로 협의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2월 초 만경좌(萬鏡座) 사건에서 비롯된 검속으로 12월 17일 예산경찰서에 붙잡혔다.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1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2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7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같은 해 7월 17일 김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1933. 3. 30.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33. 5. 15. ; 「판결문」, 고등법원, 1933. 7. 13. ;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동아일보』, 1932. 12. 20, 1933. 2. 19, 3. 29, 4. 2, 5. 9·16. ; 『조선일보』, 1933.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