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黃炳基

학생운동 대통령표창(1999)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창씨명 : 일황병기(日黃炳基)
출신지
경북 경주(慶州)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1999)

주요 활동

1944년 조선회복연구단 결성, 경북 안동에서 항일무장투쟁 계획 수립

관련 사건

안동농림학교 학생비밀결사 사건

관련 조직

조선회복연구단

생애

1923년 6월 28일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안강면(安康面) 육통리(六通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일황병기(日黃炳基)를 썼다. 1944년 안동농림학교에 다니면서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부터 상지회(尙志會)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을 통해 이갑룡(李甲龍)·장병하(張炳夏) 등과 함께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 관련 서적과 당시의 사회비판적 문학을 두루 섭렵하였다. 이를 통해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한국인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시체제로 밀어 넣고, 학생들에게는 근로동원과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를 강요하였다. 이 무렵 조속히 일제로부터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직접 행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1943년 이갑룡과 함께 안동 읍내에 위치한 손명술(孫明述)의 집에 하숙하는 동안 라디오를 통해 외국 방송을 청취하면서 일제가 불리한 전황에 놓여있음을 알게 되었고, 기존 상지회원에 이준택(李準澤)·권영동(權寧東) 등 다른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을 더하여 그해 가을부터 세계의 정세와 독립에 대한 방략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44년 10월 손명술의 집에서 연합국의 진공에 호응하여 일제를 패망시킬 무장투쟁을 계획하고 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한 후, 명칭을 조선회복연구단으로 정하였다. 이때 참모부원으로서 국내외 정세 입수와 분석, 유사시 작전계획 수립 등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믿을 수 있는 학우·지인들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집하였다. 동시에 친분이 있던 박동렬(朴東烈)이 참여하고 있던 안동 내의 또 다른 비밀결사 단체인 명성회(明星會)와 연대하여 거사하기로 계획하고, 거사일을 1945년 2월 17일로 정하였다. 이어서 거사 당일 학교 내에 보관 중인 교련용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여 읍내의 관공서를 점거하고, 전선을 절단해 통신을 차단한 후 일본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며 전민족적 궐기를 유도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황해도 겸이포제철소에 노무동원된 갈정호(葛正虎)와 궐기에 대해 편지로 논의하던 이준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며 학생들을 수사하기 시작하여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해 3월 7일 하숙집에서 이갑룡과 함께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어 약 5개월 동안 수감된 상태로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미결수 신분으로 옥고를 겪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17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경북독립운동사』 4, 경상북도, 2014. ; 신승훈, 『解放直前(1943~45) 安東農林學校 學生抗日運動硏究』, 안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