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태 黃源泰

학생운동 애족장(2006)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황원태(黃元泰)
출신지
경기 강화(江華)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2006)

주요 활동

1935년 2월 중앙고등보통학교 동맹 휴학 및 시위 활동 전개

관련 사건

중앙고등보통학교 비밀결사 사건

관련 조직

중앙고등보통학교 반제동맹

생애

1915년 2월 9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양도면(良道面) 도장리(道場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한자를 달리한 황원태(黃元泰)이다. 1935년 2월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하면서 동맹휴학과 시위를 주도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는 1926년 6·10 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해 시위를 전개하였고,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 식민지 체제의 모순성과 일제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1933년경 조국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반제동맹(反帝同盟)이 조직되었다. 1935년 교내에 조직된 반제동맹에 가입하고, 그룹에서 활동해온 황영구(黃榮九)·이준규(李浚圭) 등과 교류하였다. 1935년 2월 18일 교정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폭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학교 측에서 해당 학생을 색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월 20일 학교 측은 불만을 토로한 당사자로 지목한 동급생 정양원(鄭良元)과 김학수(金鶴秀)를 퇴학 조치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발하며 두 학생을 복교시키자는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두 학생이 퇴학당한 당일 오후 2시 갑반 교실에서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복교운동을 제안해 동급생들의 지지를 얻었고, 오후 3시 을반에서도 같은 취지로 전폭적인 호응을 받았다. 이를 통해 4학년 학생 전원이 참여한 가운데 황영구 등과 함께 학교에 두 사람의 복교를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4학년 전체가 퇴학 원서를 제출하고, 을반 교실에서 농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곧바로 요구서와 퇴학 원서를 제출하였음에도 학교 측은 학생들이 먼저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교단과 책상으로 교실 입구를 봉쇄하고 문에 못질을 하는 과정을 지휘하였다. 이후 교직원들과 종로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들이 학생들의 시위 해산을 위해 문을 열고 교실로 진입하려고 하자, 책상과 부서진 기물 파편 등을 던져 종로경찰서 소속 아베(阿部) 순사부장의 이마와 뺨에 상처를 입혔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이른바 폭력 행위,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상해, 훼기(毁棄) 등의 이유로 수사를 받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시위가 학생들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조직적·폭력적 형태라 하여, 어떠한 사주 세력의 소행으로 단정 짓고 자백을 받기 위해 붙잡힌 4학년 학생들을 가혹하게 취조하였다. 그러다가 4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반제동맹의 후신인 반제운동전교오르그위원회의 존재를 파악한 일제는 시위가 불온단체에 의해 폭력을 사주 받은 사상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과 폭력 행위 혐의로 1935년 5월 3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형사재판에 넘겨졌다. 1935년 6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현대 교육과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학생들이 학교 측과 대립하게 만들기 위해 시위를 주도하여 폭력사태를 일으켰다며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과 폭력 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私立 中央高普校 生徒의 暴行에 관한 건」, 1935. 4, 20, 『警察狀報(昭和 10年)』. ; 「秘密結社 中央高普 反帝運動 全校오르그委員會事件 檢擧에 관한 건」, 1935. 5. 22, 『警察狀報(昭和 10年)』. ; 『동아일보』, 1935. 2. 23, 5. 4, 6. 14. ; 『조선일보』, 1935. 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