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봉선 黃鳳善

학생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창원(昌原)
출신지
충남 천안(天安)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28년 독립을 목표로 하는 계림흥농사에 가입하여 활동

관련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 비밀결사 사건

관련 조직

계림흥농사, 조선개척사

생애

1908년 8월 11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목천면(木川面) 교천리(交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목천공립보통학교(木川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2년 상경하여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수원고등농림학교에서는 김찬도(金燦道)·권영선(權永善)·우종휘(禹鍾徽) 등을 중심으로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 지부 활동의 일환으로 경기도 수원군 일형면(日荊面) 서둔리(西屯里), 안룡면(安龍面) 고색리(古索里)에서 야학을 운영하면서 단기(檀紀)를 사용하고,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는 동시에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김찬도 등은 졸업 후에 한인들만으로 이루어진 농림업 회사와 농촌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농민의 단결과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여 1928년 3월 10일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의 사업계획과 규약을 작성하였다. 5월에는 수원 여기산(麗岐山) 정상에서 회합을 개최하여 조선개척사의 목적을 일제 측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표면상의 회사로서 계림흥농사(鷄林興農社)의 창설을 승인하였다. 이때 김찬도로부터 설립 취지와 계획을 전해 듣고 가입하였고, 7월까지 기숙사와 여기산 정상 등지에서 동지들과 회합하며 계림흥농사의 사업목표·계획을 확립하고, 정관(定款)을 완성·가결하는 데 참가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28년 7월 같은 학교 졸업생으로서 경상남도의 김해공립농업학교의 교사로 부임한 김성원(金聲遠)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발언을 하였다가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수사를 받게 되고, 이때 우종휘와 계림흥농사 및 조선개척사의 운영에 대해 논의한 서신을 일제 경찰이 입수하면서 발각되었다. 9월 14일 학교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이튿날인 9월 15일 정치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에 가입하였다는 이유에 따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원경찰서로 연행되어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되어 풀려났으나, 일제는 1928년 9월부터 옥중에 투옥한 상태로 수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미결 구금 기간은 약 17개월에 달하였다. 풀려난 이후 수원고등농림학교에 복학하였고, 졸업 이후 충청남도의 산업기수(産業技手)가 되어 당진군(唐津郡)·예산군(禮山郡)·홍성군(洪城郡) 등지에서 농업공무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교직에 종사하여 천안농업학교 교장, 장항농업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1955년 충남대학교 농과대학 교수에 임용되어 1973년까지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治安槪況』, 1929. ; 「水原高等農林學校 鮮人學生 朝鮮獨立運動 其他에 關한 件」, 1928. 9, 『學生盟休에 關한 情報綴』. ; 『사상휘보』 제9호, 1936. ; 『동아일보』, 1927. 3. 8, 1928. 9. 16·18, 1930. 2. 21, 1932. 3. 23, 1960. 4. 5. ; 『조선일보』, 1930. 2. 14·22, 1930, 3. 6, 1955. 2. 20. ; 『경향신문』, 1973. 8. 30. ; 이현희, 「수원고농학생의 항일투쟁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1,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