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朴世英

학생운동 애족장(199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전남 광주(光州)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3)

주요 활동

동맹휴학, 노동운동

관련 사건

맹휴 중앙본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관련 조직

맹휴 중앙본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생애

1910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광주면(光州面) 양림리(楊林里)에서 태어났다.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 4학년에 재학 중 동맹휴학에 동참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광주지역에서는 항일 동맹휴학이라는 형태로 학생들이 조직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다. 1928년 6월 광주고보 학생 이경채李(景采)가 체포되면서 광주고보 학생을 중심으로 동맹휴학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경채가 체포된 뒤 형이 확정되기도 전에 학교에서 퇴학시키자 이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광주·전남 지역 동맹휴학 투쟁이 본격화하였다. 1928년 6월 동맹휴학으로 정동화(鄭東華) 등 27명의 학생이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서재호(徐在晧) 등과 함께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에 장재성 등 광주고보 동창회도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해 7월 10일 동맹휴학을 보다 조직적으로 이끌기 위해 최규창(崔圭昌)·임주홍(林周弘) 등과 함께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하였다.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결성된 맹휴중앙본부는 참모부·통신부·경비부·외교부·회계부를 설치하여 보다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학교 내부 및 광주지방의 차별적 교육문제에서 식민지 교육체제와 식민 통치기구에 대한 비판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생들에게 격문, 경과 보고 등을 통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결속을 다졌다. 학부형들에게는 통고문 등을 보내어 동맹휴학의 정당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동맹휴학 투쟁은 학부형회가 학교 측과 타협하여 그 해 9월 17일 학생들을 등교시킴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동맹휴학을 주도했던 학생들과 함께 붙잡혔다.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후에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일반성서지구중야분회(一般城西地區中野分會) 책임자로 『적기(赤旗)』를 배포하는 등 항일활동을 이어가다가 1932년 10월 붙잡혔다. 오랜 미결 구금 기간을 거쳐 1935년 2월 27일 동경공소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른 뒤 1937년 4월 만기 출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28. 10. 5. ; 「신분장지문원지」. ; 『동아일보』 1928. 10. 2·9. ; 박경식 편,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 3권,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2·13·별집 3, 1977·1978. ;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편, 『광주학생독립운동사』, 197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김성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역사공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