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배 朴仕培

학생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밀양(密陽)
출신지
전남 진도(珍島)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시위 주도

관련 사건

목포상업학교

관련 조직

목포상업학교

생애

1913년 3월 24일 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 조도면(鳥島面) 창유리(倉)柳(里)에서 박덕협(朴德俠)과 청주 한씨(凊洲韓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동조 시위를 주도하였다. 1929년 6월 전남 목포(木浦)의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 학교는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함께 다녔는데, 한국인을 차별하였기 때문이었다. 동맹휴학의 요구조건은 ‘한국인 학생 차별 철폐, 한국인과 일본인 공학제 철폐, 직원회의에 학생대표 참가, 교장 이하 4명의 교사 배척, 보호자회 철폐’ 등이었다. 이 맹휴는 학부형회의 중재로 수습되었다.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나자, 11월 9일 진상 조사를 위해 같은 학교 5학년생 최창호(崔昌鎬)와 3학년생 이인형(李麟炯)이 광주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이튿날 주도자 장재성(張載性)으로부터 “민족적 차별에 의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에게 편파적이고 가혹한 조치를 하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다”는 말과 함께 협력을 부탁받았다. 그들은 목포로 돌아와 목포공립상업학교의 독서회원들과 협의한 결과 11월 19일 동교의 모든 한국인 학생을 규합하여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동조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6일, 목포 북교동(北橋洞) 소재 이광우李(光雨)의 하숙집에서 같은 학교 4학년 박상준(朴相俊)·임성춘林(晟春), 3학년 박종식(朴鍾殖)·오상록(吳上祿)·이광우·이인형·정찬규(鄭燦圭), 2학년 양재욱(梁在郁)·이재실李(在實) 등과 함께 회합하여 목포공립상업학교의 동맹휴교와 항의시위를 결의하였다. 전단은 이인형이 작성하여 박상준·정찬규에게 전달하였고, 11월 19일 새벽 정찬규 집에서 양재욱이 마련한 등사판으로 3~4종의 전단 약 1,500매를 제작하였다. 11월 19일 아침 이재실로부터 붉은 목면(木棉)으로 제작한 대형 깃발 1개를 받은 후, 오전 10시 30분경 학교 측에서 경찰서로 연락할 수 없도록 학교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오후 1시경 시위대는 학생을 3개 대로 편성하여 2개 대는 학교 앞, 1개 대는 송도(松島)공원에 집합하여 선전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 행진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송도공원에 집합한 1개 대에 속하였다. 앞선 2개 대 소속 학생들은 먹으로 구호를 기재한 적색 큰 기를 앞세우고, 각자 작은 기를 흔들면서 시위 행진을 하였다. 시위대는 양동(陽洞)-남교동(南橋洞)·무안통(務安通)을 거쳐 목포역으로 행진하면서 “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학생을 탈환하자!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라는 내용의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외쳤다. 또한 「2천만 피압박 민중 제군이여」라는 제목의 전단을 뿌렸는데, 전단에 적힌 구호는 대부분 식민통치 반대와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도공원에 배치된 1개 대는 격문만 살포한 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시위를 전개하지 못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출판법과 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이후 조선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예심종결결정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1930. 2. 24. ;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30. 3. 20. ; 『중외일보』, 1930. 1. 6, 3. 5·15. ; 『동아일보』, 1930. 3. 15. ; 『매일신보』, 1930. 3. 20. ; 『밀양박씨청재공파세보(密陽朴氏淸齋公派世譜)』. ; 진도군지편찬위원회, 『진도군지』, 2007. ;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성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역사공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