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남 朴熙南

학생운동 애족장(1995)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무안(務安)
이명(별칭)
호 : 벽파(碧波), 이명 : 박희남(朴喜男)
출신지
충남 당진(唐津)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5)

주요 활동

1930년 독서회 조직, 1932년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 결성

관련 사건

극단만경좌 사건

관련 조직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 토요회

생애

1914년 5월 10일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당진읍(唐津邑) 우두리(牛頭里, 현 당진시 당진3동 일대)에서 아버지 박인식과 어머니 차정덕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무안(務安)이며 호는 벽파(碧波)이다. 한자가 다른 박희남(朴喜男)을 이명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30년 당진공립보통학교(唐津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예산공립농업학교(禮山公立農業學校)(현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 학생 차별에 분노를 느껴 1930년 5월 중순 학우 박정순(朴正淳)·오일규(吳日圭)·김규환(金奎煥) 등 9명과 함께 비밀리에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이들과 함께 사회주의 관련 서적 등을 읽고 토론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당시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가 활발하게 전개하였던 문맹퇴치운동과 문자보급운동에도 동참하였다. 1932년 5월 충남 예산 출신의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하이(上海)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의거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를 전교생에게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1932년 6월 중순에는 학교에서 뽕나무 접목실습용으로 미루나무토막(10㎝ 길이) 1,000개를 가져오라는 무리한 과제를 내주자,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토요일 오후에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학교에서 권농일 행사를 앞당겨 모를 찌라는 작업 지시를 내리자, 이에 저항하여 1주일간 등교를 거부한 동맹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주도자로 몰려 학교 당국으로부터 엄중한 문책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18일 예산농업학교 선배 정종호(鄭鍾浩)·강봉주(姜鳳柱)·한정희(韓定熙)·박정순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 제도 실현을 목적으로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禮山共産主義學生同盟)을 조직하였다. 이때 이들은 “우리는 전투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투쟁한다”는 강령을 결의하고 연구부와 선전부를 두었다. 이에 정종호·박정순과 함께 사회주의 선전과 동지 확보를 목적에 둔 선전부를 담당하였다. 그해 10월 10일부터 11월 중순까지 6차례에 걸쳐 한정희의 집과 인근 금오산(金烏山) 등지에서 만나 조직의 확대 강화를 위한 동지 확보 방안을 논의한 뒤, 동급생 3학년 이종규(李鍾圭)를 가입시켰다. 또한 이강오(李康午) 등 지역 내 청년들과 서울 YMCA를 비롯한 여러 학생 조직과 연계를 강화하는 등 학생운동의 기획과 조직의 관리 업무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일제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어 학생동맹이 탄로날 위기에 처하자, 그 해 11월 동맹 명칭을 그들이 모이는 요일에 맞춰 ‘토요회(土曜會)’로 개칭하였다. 1932년 11월 중순 연극단 만경좌(萬鏡座)가 예산면(禮山面, 현 예산읍) 예산리(禮山里)에서 「동방의 빛」이란 제목으로 공연하자 공연 저지에 나섰다. 연극은 만주사변 당시 만주에 있던 어느 한국인이 마적으로부터 극도의 박해를 받아 살해될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만경좌는 일제의 지원을 받는 어용 연극단체였다. 이에 이강오·서용하(徐龍河) 등의 청년들과 함께 「동방의 빛」은 “한국인의 친일사상을 조장하고 민족의식을 감멸(減滅)시키며 일제의 지배하에 아무런 권력을 부여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헛되이 대중들에게 은혜를 강요하고 영구히 복종을 감수케 하려는 것”이라 비난하며 단원들에게 즉각 공연 중단을 요구하였다. 결국 만경좌 단원들과의 충돌로 비화되면서 1932년 11월 27일 관련자들이 붙잡혔고, 토요회까지 발각되어 같은 해 12월 17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정종호·한정희 등 12명과 함께 1933년 2월 17일 공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고 그 해 3월 30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당시 혹독한 고문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당진면농회와 당진군농회, 1961년 1월부터 1961년 5월까지 당진면의회 의원을 역임하였고, 1994년 10월 16일에는 예산농업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공주지방법원, 1933. 3. 30.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33. 5. 15. ; 『동아일보』, 1932. 12. 5·20·25, 1933. 1. 1·7, 2. 12·14·19, 3. 19·29, 4. 2, 5. 9·16. ; 『중앙일보』, 1994. 10. 1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