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식 朴鍾殖

학생운동 건국포장(199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밀양(密陽)
출신지
전남 진도(珍島)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건국포장(1993)

주요 활동

1929년 목포상업학교 학생들과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관련 조직

목포공립상업학교

생애

1911년 12월 20일 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 고군면(古郡面) 지막리(芝幕里)에서 박원배(朴元培)와 곽동순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929년 11월 전남 목포공립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전남 광주에서 한·일 학생간에 충돌 사건이 일어났으나 한국인 학생 10명만 붙잡혀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11월 7일 목포 북교동(北橋洞) 이상원(李尙源)의 방에서 최창호(崔昌鎬)를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먼저 진상을 조사한 뒤 대책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어 11월 19일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고 목포상업학교 학생들 규합에 나섰다. 11월 16일 이광우의 방에서 박상준(朴相俊)·임성춘(林晟春) 등과 함께 이인형(李麟炯)이 초안한 선전 전단문, 동맹휴교 결행문 등을 수정·보완하였다. 이 문서는 거사 당일인 11월 19일 새벽에 정찬규(鄭燦圭)의 방에서 1,500여 장이 인쇄되었다. 1929년 11월 19일 아침 임성춘(林晟春)·이광우(李光雨)·이인형 등은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인쇄한 전단지를 배포하며, 오후 12시 30분에 전개될 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알렸다. 약속한 시간에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인 가운데 2개조로 나누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1시경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한 뒤, 이재실(李在實)이 제작한 ‘학생 즉시 탈환’,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압박 민족해방 만세’ 등의 글씨를 새긴 큰 깃발과 붉은 종이의 작은 깃발을 든 5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행진하며 전단지를 살포하였다. 이어 행진을 계속하며 양동(陽洞)·남교동(南橋洞) 무안통(務安通)을 경유하여 목포역 앞에서 선전문을 배포하였다. 다른 조는 송도공원(松島公園)에 모인 뒤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때 동지 21명과 함께 붙잡혀 1929년 12월 17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뒤에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이어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1930년 3월 20일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해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미결구류일수 중 110일 본형 산입)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30. 3. 20.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0. 6. 21. ;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동아일보』, 1930. 1. 9, 2. 28, 3. 4·15·16·22·2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광주학생독립운동사』,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