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응호 盧應昊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광주(光州)
이명(별칭)
노용호(盧龍昊)
출신지
경남 합천(陜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건국포장(1998)
주요 활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여 서울학생항일시위에 참여
관련 사건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 조직
학생전위동맹
생애
1911년 5월 28일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德谷面) 장리(壯里)에서 아버지 노이겸(盧以謙)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소식이 서울에 전달되자 서울지역에서도 이에 동조한 학생항일시위운동이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이때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으로, 1929년 12월 5일 저녁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이호중(李浩中) 등이 동맹휴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듣고 이에 동참하여 5학년의 책임자를 맡았다. 다음 날 12월 6일 선언문을 작성하기로 한 이석(李錫)의 집을 방문하여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를 허용하라’, ‘광주 조선인 학생을 즉시 석방하자’ 등의 선언서를 함께 제작하였다. 12월 7일 3·4학년 학생들이 먼저 동맹휴학을 선언하여 소란해지자 즉시 앞으로 나가 선언서를 낭독하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이후 만세를 부르며 학교를 벗어나 시위운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이미 교사들과 경찰이 교문을 막고 있어 나가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30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이미 1년여 간 옥고를 치른 후였고 학교에서도 퇴학당한 상태였다. 풀려난 후 고향 합천군 덕곡면 장리로 돌아와 야학교와 학술강습회를 설치하여 농촌 아동들의 문맹퇴치에 헌신하다가 옥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34년 5월 23일 사망하였다. 그간 사망일자가 1933년 4월 10일로 알려져 왔으나 『동아일보』 1934년 5월 27일자 기사 「촌선생의 유덕(村先生)의 (遺德)」에 의하면 1934년 5월 23일로 확인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30. 12. 19.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9, 2002. ; 『중외일보』 1930. 9. 24·27. ; 『조선일보』 1930. 12. 21. ; 『동아일보』, 1934. 5. 27. ;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편, 『광주학생독립운동사』, 국제문화사, 1974. ; 최성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고려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