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구 金弘九

학생운동 대통령표창(1998)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의성(義城)
이명(별칭)
호 : 소저(小渚)
출신지
경북 안동(安東)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1998)

주요 활동

1943년 비밀결사로 조직된 명성회 참여

관련 사건

안동농림학교 명성회 사건

관련 조직

명성회, 조선독립회복연구단

생애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길안면(吉安面) 지례리(知禮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호는 소저(小渚)이다. 일제가 창시개명을 강요하자 국지홍구(菊池弘九)로 고쳤다.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재학 중 학생 비밀결사인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해 조직책(組織責)을 맡으며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안동농림학교 임과(林科)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전시(戰時)체제하에서 군사교육을 받거나 군수물자 지원 활동에 자주 동원되었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1943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도 대구 80연대로 끌려가 신체 검사를 받기도 하였다. 명성회는 1943년 4월 하순 무렵, 안동농림학교 9회생 이정선(李貞善)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로 ‘명성’은 샛별을 의미하며 ‘새날이 시작되게 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명성회 결성을 주도한 이정선은 일본 유학 중 만난 이회술(李會述)에게 무선통신·선전 등을 교육받고 일본의 패전이 머지않았으니 귀국해 비밀결사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또한 이회술에게 충칭(重慶)에 위치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여러 활동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국내진공계획을 전해 들었다. 초기에는 9회 학생만으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회원을 늘려 안동농림학교 10회생과 인근의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 학생과 일반인도 참여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두 차례 모여 역사서와 사상서를 읽으며 민족의식을 키웠고, 혈서로 이름을 적어 항일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국제정세와 태평양전쟁 전황, 국외 독립운동 상황도 공유하였다. 명성회는 학생과 지식인 계층의 항일의식 고취를 위해 회지 『あけぼの(아케보노, 새벽·여명)』도 발간하였다. 국문과 일본어를 혼용한 8~16쪽 분량의 등사본이었으며, 문학 작품과 함께 민족의식을 일으키는 글을 실었다. 1943년 10월부터 준비해 1944년 한 해 동안 1~4호를 만들어 배포하였고, 원고는 회원이나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기고하였다. 이어 1944년 10월 무렵 조선독립회복연구단(朝鮮獨立回復硏究團)과의 연대 활동을 시작하며 발행 부수도 점차 늘렸다. 1944년 11월에는 조선독립회복연구단과 연대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 8·9회생이던 권영동(權寧東)·황병기(黃炳基) 등을 주축으로 1943년 10월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조직 활동은 평소대로 따로 추진하면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서 거사 계획을 세우고 명성회가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고 1945년 2월 17일에 무력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안동경찰서와 헌병파견대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교통·통신시설을 차단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봉기를 선동하는 벽보를 제작해 붙이고 확성기로 연합군 승전 소식을 알리는 등 일반인도 무력 봉기에 동참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부터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조선독립회복연구단원 일부가 붙잡혔다. 거사를 일으킬 날을 3월 10일로 옮겼으나, 관련자 다수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1945년 3월 10일 일본 경찰에 붙잡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구감옥 안동분감(안동형무소)에 갇혔다. 재판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해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서 기소유예 불기소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형사사건부」. ; 안동농림고등학교 편, 『안동농림50년사』, 안동농림고등학교, 1983. ; 신승훈,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 광복회경상북도지부·안동시지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