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두 金炯斗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김병두(金炳斗)
출신지
전북 군산(群山)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2017)
주요 활동
1930년 1월 평양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 격문 인쇄 및 배부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생애
1911년 전라북도 군산군(群山郡)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전라북도 군산부(群山府) 구암리(龜岩里)이다. 상세한 출생일시는 확인할 수 없으나, 1930년 당시 20세라는 기록으로 보아, 1911년생으로 추정된다. 1929년 4월 평양(平壤)의 사립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였다.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 소식이 1929년 12월 초부터 전파된 평양 지역에서는 12월 14일에서 18일까지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 숭인학교(崇仁學校),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학생들이 시험에 불응하고 백지 답안을 제출하였다. 일제 경찰은 학생 다수를 붙잡았다가 풀어주기도 하였다. 방학으로 학생들의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으나, 1월에 개학을 맞이하며 다시 운동이 확산되었다. 1930년 1월 12일 새벽에 평양 종로(鐘路)의 각 상점에 격문이 뿌려졌다. 1월 19일과 20일에는 숭실전문학교, 숭의여학교 등 평양 시내 학교에 격문이 뿌려졌다. 1월 21일 오전 10시경에는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 광성보통학교(光成普通學校), 숭인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음날인 1월 22일 오전에도 평양 시내 12개 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틀간의 만세 운동에 학생 2,4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시위로 인해 학생 150여 명이 붙잡혔고 각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1월 23일에는 일제 경찰이 숭실전문학교 기숙사를 포위해 수색하였고, 학생 다수가 체포·구금되었다. 이 시기 숭실전문학교 학생으로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격문을 제작해 나누어 주었다. 1930년 1월 18일 숭실전문학교 학생 강기순(康基淳)·김봉덕(金鳳德)과 함께 강기순의 집에서 “전국 각지에서 학생 만세 사건이 발생하니 평양에서도 격문을 인쇄해 배부하자”고 결의하였다. 1월 19일부터 22일까지 「삼천평양남녀학생에게 고한다」, 「피는 끓는다」, 「제국주의를 □□하라」는 내용의 격문 초안을 함께 작성하고, 이를 배포하였다.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등사판으로 여러 매를 인쇄했으며, 같은 학교 학생 채정근(蔡廷根)·송희선(宋熙善)·윤제만(尹濟萬)·김양선(金良善), 용강 신흥학교 교원 이능상(李能相) 등과 함께 평양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배부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벌이다가 1930년 1월 23일 일제 경찰에 붙잡힌 후 2월 6일 송치되었다. 1930년 3월 1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3월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격문의 초안을 작성하고 배부한 일에 대해 당당히 진술하였다. 1심 재판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그 해 5월 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금고 3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0년 5월 6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0. 2. 6. ; 『중외일보』, 1930. 2. 22, 3·13·14, 5. 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숭실대학교100년사편찬위원회 편, 『숭실대학교 100년사』 1,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