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 南榮熙

학생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의령(宜寧)
이명(별칭)
호 : 간송(磵松)
출신지
충남 아산(牙山)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26년 수원고농 건아단에 참여하고, 1928년 수원고농 조선개척사 조직 후 활동하며 농촌 야학을 운영하여 민족의식 고취

관련 사건

6.10만세운동, 수원고등농림학교 사건

관련 조직

건아단, 조선개척사, 계림농흥사, 조선농우연맹

생애

1905년 12월 30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음봉면(陰峰面) 동천리(東川里)에서 남정일과 조정필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의 18대손이다. 호는 간송(磵松)이다. 1920년대 국내항일운동 단체 건아단(健兒團)등에서 활동하고 농촌 야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현 중앙고등학교) 5학년 재학 중 6·10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 계획 단계부터 참여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이후 옥에 갇힌 학우를 돕는 일에 적극 나섰다. 학년별로 성금을 모아 면회를 가거나 사식과 내복을 차입(差入)해 주었다. 192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 이하 수원고농, 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직후 김찬도(金燦道)·권영선(權永善) 등 재학생 10명이 주도하여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건아단(健兒團)에 가담하였다. 수원고농은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는데, 구식 건물인 동료(東寮)에는 한국인 학생이, 신식 건물인 서료(西寮)에는 일본인 학생이 생활하였다. 민족차별과 동·서로 학생 간의 크고 작은 충돌 등을 겪으며 한국인 학생들은 1919년 만세운동과 1926년 6·10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26년 조국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수원고농 내에 조직되었는데, 이것이 건아단으로 발전하였다. 건아단은 한국인 기숙사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매일 아침 맨손체조와 냉수욕을 하고, 등산과 도보 여행으로 심신을 단련하였다. 또한 도서관을 자치적으로 운영하면서 한글 신문과 잡지를 비치하고 명사 초청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더불어 학교 부근 농촌에 야학당을 설치하고 순번을 정해 한글과 수학, 역사를 강의하였다. 건아단은 1927년 여름방학 때 떠난 수학여행에서 강원도의 일본인 대규모 농장을 목격하고 이와 같은 농장 건설을 꿈꾸게 되었다. 이를 위해 1928년에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농촌운동 단체인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원 한전종(韓典鍾)이 조선농우연맹의 순회 강연회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되자, 조직의 명칭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바꾸었다. 계림농흥사 또한 이상적 농촌 사회 구현을 목표로 내세우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회원들은 여름방학 동안 수차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조직을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바꾸기로 하였다. 조선개척사는 농촌 계몽과 농민 운동을 통해 일본이 외국과 전쟁 중인 상황을 이용해 농민 봉기를 꾀하고, 민족의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을 수 있는 단체로 위장할 계획을 세웠다. 민족의 독립을 목표로 활동하나 표면적으로는 농촌사업단체로 위장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수원고농 선배로 건아단 조직 이래 단원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던 김성원(金聲遠)이 붙잡히면서 조직이 발각되었다. 김성원은 졸업 후 김해공립농업학교(金海公立農業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는데, 1928년 5월 1일 어린이날 축하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발언을 한 일로 일제 경찰의 주목을 끌었다. 일제 경찰은 김성원의 하숙방을 수색하여 수원고농 후배 우종휘(禹鍾徽)와 주고받은 편지를 찾아내었다. 이로 인해 조선개척사 결성 취지문에 서명한 학생 11명이 모두 붙잡혔다. 이 일로 1928년 9월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 동안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였다. 1930년 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출옥 후 충남도청과 경기도청 토지개량과에 재직하였다. 광복 후 농림부 토지개량과장으로 근무하며 농촌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1960년 경기도 농사원장을 퇴직하고 대한수리조합연합회(大韓水利組合聯合會) 이사로 취임하였다. 1963년 3월에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옛 동지들과 함께 6·10만세동지회(현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7부터 1974년까지 건국대학교(建國大學校) 교수와 대우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75년에는 소유한 토지를 기증해 간송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994년 5월 아산시 음봉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그의 뜻을 기리는 공적비가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중외일보』, 1930. 2. 2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이춘녕, 『수원농학칠십년』, 서울대학교, 1976. ; 중앙교우회 편, 『인물로 본 중앙 100년』,창미, 2009. ; 이현희, 「수원고농학생의 항일투쟁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1,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