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술 朴福述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박정희(朴貞喜)
출신지
전남 목포(木浦)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2012)
주요 활동
1921년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시 만세운동 참여
생애
1903년 8월 30일 전라남도 목포부(木浦府) 북교동(北橋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정희(朴貞喜)를 사용하였다. 1921년 당시 목포 양동(陽洞)에 위치한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에 재학하였다. 1921년 11월 14일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永興學校) 학생들이 벌인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학생들은 당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문제 상정을 요구하기 위하여 시위를 벌였다. 평소 『동아일보』를 읽었던 천귀례(天貴禮)는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 연안의 여러 나라 대표들이 모여 평화를 위한 회의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 회의에 한국을 대표한 인사들이 파견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국대표가 회의에 참가하여 독립문제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지지한다는 성원을 각지에서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1921년 11월 13일 정명여학교 기숙사에 천귀례·곽희주(郭喜主)·김나열(金羅烈)·박음전(朴陰田)·문복금(文卜今)·김연순(金蓮順)·이남순(李南順)·주유금(朱有今)·김옥실(金玉實)·김귀남(金貴南)·김자현(金慈賢) 등 11명의 학생들과 함께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만세운동을 벌이는 것에 찬성하여 뜻을 함께 하였다. 이들 12명은 다음날인 14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정하고, 기숙사에서 태극기 수십 매를 만들었다. 정오를 신호로 하여 각자 태극기를 들고 교문을 나와 시내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11월 14일 정오가 되자 약속한 대로 동료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교문을 나섰다. 동료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남교동(南橋洞)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세 소리를 듣고 정명여학교 학생들 몇몇이 따라와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남교동을 지나 죽동(竹洞)으로 가며 만세를 불렀고, 이윽고 창평정(昌平町)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기서도 만세시위를 본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학교를 나와 만세를 부르며 대성동(大成洞)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세운동 소식을 들은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때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21년 12월 2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항소심 미결구류일수 50일 본형 산입)되었다.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22년 7월 23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2. 3. 11. ; 「형사사건부」. ; 「假出獄 具申의 件」, 대구감옥, 1922. 7. 12. ; 『동아일보』, 1922. 1. 23. ; 『매일신보』 , 1922. 3. 1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