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웅 朴贊雄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창씨명 : 궁본찬웅(宮本贊雄)
출신지
충남 금산(錦山)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국장(1990)
주요 활동
1940년부터 비밀결사인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활동
관련 사건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독서회) 사건
관련 조직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생애
1919년 11월 14일 충청남도 금산군(錦山郡) 군북면(君北面) 외부리(外部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궁본찬웅(宮本贊雄)으로 고쳤다.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면서 독서 토론을 통해 국제 정세를 분석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학생들의 조직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40년 11월 이른바 ‘왜관사건’을 일으킨 대구사범학교 5학년(7기생) 박효준(朴孝濬)·강두안(姜斗安)·이태길(李泰吉) 등을 비롯해 4학년(8기생) 류흥수(柳興洙)·이동우(李東雨), 3학년(9기생) 김근배(金根培) 등과 함께 이태길의 집에 모여 민족의식 앙양과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에 학교 당국과 일제 경찰의 감시와 경계를 피하기 위해 겉으로 문예 활동을 표방하며 비밀 결사 명칭을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로 결정하였다. 1940년 11월 하순부터 1941년 2월초까지 장소를 옮겨 다니며 회원 각자의 작품을 비평하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당시 정세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1941년 3월에는 문예부의 잡지 『학생』을 발행하여 그간의 성과를 담았는데, 민족의 발전을 위해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41년 2월 8기생인 5학년의 졸업을 앞두고 박효준·이태길·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졸업 후 각자 근무할 초등학교에서 우수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졸업생들은 교사로 부임하는 즉시 아동과 학부형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한편 박효준에게 매월 1회씩 활동 상황을 보고할 것과 자신들이 쓴 문예 작품집 『반딧불』을 발행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보고 사항과 문예 작품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으로 위장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9기생과 10기생들을 문예부에 회원으로 가입시켜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하였다. 1941년 3월 졸업 후 충남 논산군 소재 노성공립국민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문예부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문예부의 잡지 『학생』을 발간할 때 출판비의 일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941년 7월 충남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대구사범학교 8기생 출신 정현(鄭鉉)이 소지하고 있던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 일로 인해 대구사범학교의 비밀결사가 드러나 관련자 3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때 강경경찰서에 붙잡혔고, 2년여 동안 미결수로 고초를 겪었다. 1943년 2월 8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해 6월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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