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열 朴在烈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전북 진안(鎭安)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1995)
주요 활동
1930년 1월 서울 협성실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학생시위 주도
생애
1907년 8월 17일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상전면(上田面) 주평리(珠坪里)에서 태어났다. 1926년 진안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머물다가 서울로 상경하여 1928년 3월 사립협성실업학교(私立協成實業學校)에 입학하였다. 서울에서는 계동(桂洞)에서 살았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으로 많은 학생이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이 한국인 학생들을 부당하게 취급하여 각지의 학생들은 민족 차별에 항의하여 시위와 동맹휴학을 조직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다. 그 해 12월 초부터는 서울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협성실업학교에서도 같은 해 12월 10일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학교 당국의 임시휴교 조치로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1930년 1월 초 개학에 즈음하여 학생들이 다시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1월 15일 오후 급장으로서 학생들에게 전출 가는 담임교사에 대한 기념품 증정을 제안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학생들로부터 다른 학교에서 모두 동맹휴학이나 시위를 벌이는데 우리 학교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의견이 대두되자 이에 찬성하였다. 다만 다른 학년 대표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3학년 정윤희(鄭允熙)와 1학년 이세원(李世遠)을 비롯하여 이동원(李東遠)·김성원(金聖淵)·전택만(田宅萬)·공달윤(孔達允)·정금생(鄭生金)·채수복(蔡壽福)·강영찬(姜泳讚)·김영완(金永完) 등 10명과 함께 의기투합하였다. 이들 11명은 1월 16일 오전 9시 30분을 기하여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학교에서 낙원동(樂園洞)을 거쳐 종로(鍾路)까지 행진하기로 하였다. 또한 시위에 사용할 붉은 기를 각자 만들어 오기로 하였다. 학교 내 역할도 분담하였는데, 당시 전택만과 함께 2학년 연락을 맡았다. 1930년 1월 16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공달윤·김영완 등과 함께 학생들을 규합하는 데 힘썼다. 당일은 임시휴교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등교하였다가 임시휴교 발표를 본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교정에서 기다리도록 하였다. 9시 30분이 되자 교정에 모인 학생 10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학원의 독립’과 ‘만세 피압박 민족’이라고 쓰인 붉은 기를 앞세우고 학교 바깥으로 행진하였다. 정윤희가 이끄는 그룹은 종로로 나와 탑골공원으로 행진하였다. 이세원이 앞장선 그룹은 익선동(益善洞)을 지나 창덕궁 앞을 거쳐 봉익동(鳳翼洞)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날 시위를 벌이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1930년 2월 21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이튿날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미결구류일수 중 11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선고내용에 대해 검사가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 공판에서 기각되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30. 7. 24. ; 『조선일보』, 1930. 2. 1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53,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