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찬 金玟贊

학생운동 애족장(199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김문찬(金汶贊)
출신지
강원 이천(伊川)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3)

주요 활동

192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시 건아단 가입, 농민야학, 1928년 건아단의 계림농흥사 개편 주도

관련 사건

조선개척사사건

관련 조직

건아단(조선개척사)

생애

1902년 11월 19일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읍내면(邑內面) 천안리(泉岸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문찬(金汶贊)이 있다. 1927년 3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 전문학교인 수원고등농림학교(수원고농)에 진학하였다. 수원고농에서 비밀결사 건아단(健兒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건아단은 수원고농 재학생이던 김성원(金聲遠)·김찬도(金燦道) 등 10여 명이 참석했던 조선인학생담화회(朝鮮人學生談話會)를 매개로 하여 조직되었다. 담화회에 참석한 한국인 학생들은 1926년 여름 수원고농 내에 김찬도를 지부장으로 한 조선농민사 지부를 설치하고 그 사업으로서 학교 인근 수원군 일형면(日荊面) 서둔리(西屯里, 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와 안룡면(安龍面) 고색리(古索里, 현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에서 야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927년 6월 “농민대중을 개발시켜 신조선을 건설하자”라는 강령 하에 비밀결사로 건아단을 조직하였다. 건아단의 일원으로 야학 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1928년에는 신간회 교토(京都)지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교토노동조합, 조선청년총동맹 재일본청년동맹 교토지부 등에서 온 「전조선피압박학생에 격함」이라는 문서를 받아 보관하였다. 건아단 구성원들은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 중에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과 접촉하였다. 조선농우연맹은 1928년 6월 도쿄(東京)에서 전문학교 이상의 학생들로 조직되었으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 농촌 개발을 주장하였다. 이 연맹의 목표가 건아단과 일치한다고 판단하여 조선농우연맹의 지부로 가입하였다. 그리고 한전종(韓典鍾)을 건아단의 대표로 조선농우연맹 조선강연단에 파견하였는데,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강연단이 해체되고 한전종은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 사건 이후 건아단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개편하였다. 이 개편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5월 계림농흥사의 조직 준비를 위해 김찬도·우종휘·고재천·육동백과 회합하여 조직의 목적과 회원의 종류 등을 협의하였고, 6월에는 초안 위원으로 우종휘·고재천과 함께 선임되었다. 또한 구체적 활동방안에 대한 계획서를 작성하였다. 1928년 여름 김해공립농업학교 교사로 일하던 졸업생 김성원이 체포되자 계림농흥사를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개편하였다. 조선개척사는 회원의 자격 한국인으로 제한하였으며, 신간회 강령 준수 등의 3항의 실무 원칙을 바탕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경 조선개척사가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체포 직후 학교에서 퇴학당하였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30년 2월 20일 예심결정 결과 면소되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水警高秘 第31**號, 水原高等農林學校 鮮人學生 朝鮮獨立運動 其他에 關한 件」, 1928.9, 『學生盟休에 關한 情報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자자료집』 제13집, 1977. ; 『동아일보』 1927.3.6, 1928.9.16, 9.18. ; 『조선일보』 1930.2.20.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6. ; 조성운, 「일제하 수원고농의 학생운동과 상록수운동」, 『경주사학』 14, 경주사학회, 1995. ; 이현희, 「수원고농학생의 항일투쟁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1,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9. ; 김호일, 「건아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