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남 金向南

학생운동 애족장(199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전남 완도(莞島)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3)

주요 활동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 주도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관련 조직

독서회

생애

1908년 4월 15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청산면(靑山面) 여서리(麗瑞里)에서 태어났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전남 광주의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광주군(光州郡) 광주면(光州面) 수기옥정(須奇屋町)에 위치한 이숙경(李淑卿)의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독서회’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이 고취된 한인 학생들과 이에 차별 의식을 갖던 일본 학생들 사이의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한·일 학생 사이의 대립은 11월 3일 결국 분출되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김보섭(金普燮)·김상환(金相奐)과 함께 300여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먼저 광주중학교를 습격하려고 하였지만, 경찰과 소방대에게 저지당하였다. 그러자 시내로 방향을 바꿔 본정통(本町通), 광주우편국, 광주도립병원 등으로 이동하였고, 오후 3시경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11월 5일 일제 경찰은 이 일과 관련된 중학생 7명과 고보생 14명을 체포하였다. 하지만 이후 관련자에 대한 대규모 검거를 진행해 11월 12일에는 72명의 학생이 붙잡혔고, 62명이 검사국으로 송치된 이후 광주형무소에 갇혔다. 사건에 관련된 고보 학생 30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참가자 전원이 퇴학당하였다. 이때는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한편 11월 3일 이후 광주의 모든 중등학교가 임시 휴교하자, 독서회를 이끌었던 장재성(張載性)과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인 장석천(張錫天) 등의 주도로 대규모 검거에 대한 대책과 이후 시위 운동의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11월 10일 밤 장석천을 비롯하여 광주고보 학생 5명과 함께 앞으로 시위 계획을 협의하였다. 장재성과 장석천은 박오봉(朴五鳳)·강석원(姜錫元)·나승규(羅承奎) 등과 함께 11월 12일 학교 수업 시작과 동시에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장석천에게 이날 결정을 전달받고, 12일 등교해 5학년 을조 교실에 들어가 “교우들이 구속되어 있는데 그대로 있을 수 있느냐?”며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5학년 학생들은 이끌고 교실 밖으로 나오자, 학교 전체 학생이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시위로 광주고보생 19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금고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그 해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김향남 외 23인)」, 대구복심법원, 1930. 5. 15. ;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광주학생독립운동사』, 1974. ; 최성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고려원, 2001. ;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성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역사공간,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