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金東赫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충남 홍성(洪城)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2008)
주요 활동
1919년 3·1운동시 독립선언서 등 배포,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조사부 상무이사,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 1929년 신간회 회보 편집위원
관련 사건
3·1운동, 신간회
관련 조직
조선물산장려회, 신간회, 재만동포옹호동맹
생애
1901년 11월 15일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면(廣川面) 옹암리(瓮岩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교우 임창준(林昌俊)에게서 독립선언서 6매를 받아 남대문 안 민가에 배포하였다. 3월 2일과 5일에는 학생 허신(許信)에게서 『조선독립신문』 제2호 10매를 받아 낙원동 부근 민가에 배포하였다. 3월 5일 다시 허신으로부터 『조선독립신문』 제3호 7~8매를 받아 낙원동 부근 민가에 배포하며 시위를 선도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3년 1월 9일 유진태(兪鎭泰)·이종린(李鍾麟)·백관수(白寬洙) 등 20여 단체 대표가 서울에서 모여 조선물산장려회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같은 달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協成學校)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창립총회에서 유성준(兪星濬)·김철수(金喆壽)·김윤수(金潤秀)·최순탁(崔淳鐸)·박붕서(朴鵬緖)·김덕창(金德昌)·최경호(崔敬鎬)·고용환(高龍煥) 등 20인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25일에는 당시 경기도 참여관이었던 유성준을 이사장으로 선출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는 평양과 동래에 지방 조직을 두었으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청년회와 상인회(商人會) 등으로부터 활동을 지원받았다.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집행기관으로 이사회를 두고 이사회 산하에 경리부·조사부·선전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부서에 상무이사를 두어 회의 실무를 계획·집행하였다. 이때 조사부 상무이사로 활동하였으며, 『산업계』·『자활』·『조선물산장려회보』·『장산(奬産)』·『실생활(實生活)』 등 기관지를 간행하였다. 1925년 삼시협정(三矢協定) 체결로 중국에서는 만주 장쭤린(張作林) 군벌정권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고, 1927년에는 만주군벌 당국의 한국인 이주민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졌다. 이에 1927년 12월 9일 신간회(新幹會)가 중심이 되어 조선교육회관에서 각 사회단체 대표 70여 명이 모여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창립하였다. 위원장에는 안재홍(安在鴻), 상무위원에는 박동완(朴東完)·윤치호(尹致昊)·신석우(申錫雨) 등 12인이 선출되었다. 이낙영(李樂永)·홍명희(洪命憙)·박형병 등과 30인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8월 신간회(新幹會) 회보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제1권, 원서방,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13·14집,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권, 1976. ; 이균영, 『신간회연구』, 역사비평사, 1993. ; 신용하, 『신간회의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의 역사 4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