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흥 閔泳興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민영흥(閔永興)
출신지
전남 화순(和順)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대통령표창(1995)
주요 활동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당시 시위 참여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생애
1911년 5월 12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외남면(外南面) 사평리(砂坪里, 현 남면 사평리)에서 태어났다. 자료에는 민영흥(閔永興)으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1929년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 광주고보) 5학년에 재학하고 있었다. 재학 시절 학교 인근인 광주면(光州面) 성저리(城底里) 윤재일(尹在日)의 집에서 하숙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와 광주 사이를 통학하는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이튿날에도 등하교 때 양측 학생 사이에 실랑이가 이어졌다. 이 일이 확대되어 11월 1일 광주에서는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이 대치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학교와 일상에서 차별을 겪고 있던 학생들은 이 과정을 거치며 민족감정이 고조되었고, 마침내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한일 학생간의 시비가 붙어 격투로 비화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하였는데, 경찰과 교사들이 현장에 와서 겨우 이들을 해산시켰다. 해산 후 학생들은 선후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학교로 돌아가 광주고보 대기실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하여 학생 대표자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논의 결과 학생들은 곤봉 등을 가지고 대오를 지어 광주시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11월 3일 오후 1시경 광주고보생 200여 명과 함께 대오를 짓고 학교를 출발하여 시위에 나섰다. 광주천을 건너 장터를 거쳐 광주의원으로 행진하는 도중 경찰의 제지를 받았으나, 동료 학생들과 함께 교가를 부르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을 슬로건을 내세웠다. 시내를 행진한 후 오후 3시경 학교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이후 이어진 검거 선풍으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2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등으로 금고 6월을 받자 항소하였다. 1930년 5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6월에 집행유예 5년(미결구류일수 80일 통산)을 받고 풀려났다. 이때까지 약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0. 5. 15. ; 「수형인명부」. ; 「집행원부」. ; 「형사사건부」. ; 『동아일보』, 1930. 2. 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한규무, 『광주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