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金麟圭

학생운동 애족장(199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창씨명: 금촌무호(金村武浩)
출신지
경남 양산(梁山)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3)

주요 활동

1940년 부산공설운동장 학생의거 주도

관련 사건

부산공설운동장 학생의거

관련 조직

동래중학교

생애

1922년 8월 22일 경상남도 양산군(梁山郡) 하서면(下西面) 선리(善里)에서 태어났다. 1936년 동래중학교(東萊中學校, 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940년 당시 5학년이었다. 제2회 경상남도 학도전력증강국방대회(學徒戰力增强國防大會)에서 심판장 노다이(乃台)의 판정에 불복한 동래중학교(東萊中學校)와 부산제2상업학교(釜山第)2(商業學校) 학생들의 부산학생항일의거(釜山學生抗日義擧), 일명 ‘노다이(乃台)사건’에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부산·마산·진주 등 부산 인근지역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경상남도 학도전력증강국방대회(學徒戰力增强國防大會)가 개최되었다. 제1회 대회에서 한국인 학교인 동래중학교가 우승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경남 전역의 일본인 학교 교관들은 제2회 대회는 반드시 일본인 학교를 우승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은 야외군사훈련(野外軍事訓鍊)을 비롯하여 대회의 입장식·턱걸이·넓이뛰기·담가(擔架, 물건이나 사람을 나르는 들 것) 운반·행군 경기에서 총지휘관 노다이의 불공정한 경기운영과 판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점수가 가장 많았던 행군경기에서 심판관 마키타(牧田) 소위는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釜山中學校)를 앞질러 1위를 달리던 부산제2상업학교에 대해 반칙을 선언하고 경주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모든 학교가 지나간 후에야 다시 달리게 하여 부산중학교가 1위를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심판의 판정에 학생들의 불만이 커지자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 교사들이 항의하였으나 심판장 노다이는 항의를 묵살하였다. 이러한 편파 판정에도 불구하고 동래중학교는 종합 점수에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에 본부석에서는 총점을 발표하지 않은 채, ‘단추가 풀렸다’ 혹은 ‘각반이 풀렸다’는 등 용의불량을 들어 감점을 하였다. 한국인 학생들을 더욱 자극한 것은 동래중학교의 총점이 부산중학교의 총점에 비해 0.5점이 앞섰으나 결과 발표에서는 오히려 0.5점 뒤졌다고 발표되었다. 이에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 학생들은 폐회식 참가를 거부하였으나, 학교 당국의 강력한 권유로 말미암아 참여하게 되었다. 폐회식에서 학생들은 대회의 부당성을 항의하고 「아리랑」 등 민요를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폐회식장은 일본인에 대한 총공격장이 되었다. 그 후 1,000여 명의 학생들은 운동장 입구에서 다시 집결하였으며, 학생들은 시가행진을 한 뒤, 영주동에 있는 노다이의 관사를 공격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들이 귀가하는 학생 200여 명을 붙잡았다. 이때 사건의 주도자로 지목된 11명에 포함되어 기소되었고, 1941년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41년 8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42년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노다이사건회상록乃台事件回想錄」, 『부산학생항일의거의 재조명』, 1992. ;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발전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93. ; 정병준,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석희, 「일제말기 부산의 항일운동」, 『부산학생항일의거의 재조명』,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