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호 白在鎬

학생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수원(水原)
출신지
전남 장성(長城)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39~1941년 조선학생동지회 활동

관련 조직

조선학생동지회

생애

1917년 1월 25일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삼서면(森西面) 홍정리(紅亭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고향인 장성군 삼서면 홍정리는 수원 백씨의 집성촌이다. 1939년에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4월 고창(高敞)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38년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東京)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재학하면서 도쿄 중앙 교우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9년 12월 일시 귀국하여 서울 중앙고보 졸업 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유학 중인 외종사촌 고영완(高永完)으로부터 조선학생동지회의 취지를 전해 듣고 이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연희전문학교 학생 김상흠(金相欽)이 동급생 서영원(徐泳源)·김영하(金永河)·윤주연(尹柱淵) 등과 함께 조직한 항일결사였다. 고영완은 김상흠과 사돈지간이었다. 동지회는 1919년 만세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1942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한 뒤에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도쿄 유학생을 비롯하여 해외의 유학생들과도 연대하기로 하였다. 동지회의 격문은 “생명마저 빼앗으려는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 3월 1일을 기하여 봉기하자.”는 내용이었다. 동지회는 1940년 2월부터 조직이 발각된 1941년 7월까지 일제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연희전문학교 뒷산, 남한산성, 서울 냉천동 약수터, 벽제관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 규합과 조직 확대에 노력하였다. 또한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한글 사용 금지,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암송’ 등에 대한 반대투쟁과 함께 한국사를 틈틈이 공부하였다. 이러한 국내 활동에 호응하고자 동지회의 도쿄 유학생 대표로서 회원들 간의 연락을 도맡아 결속을 다지고, 거사일에 맞춰 회원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1941년 7월 국내에서 동지회의 하부 조직인 원산상업학교 이근갑이 열차 안에서 한국사 책을 읽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조직이 드러났다. 동지회의 주도 세력이 1941년 9월 체포된 이후 도쿄에서 붙잡혀 함경북도경찰국으로 이송되었다. 경찰서에서 갖은 고문을 받아가며 조사를 당하였고, 1년 6개월 만인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고려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1949년 2월부터 5월까지 전남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서기관에 선임되어 조사 활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동광신문』, 1949. 2. 20, 5. 20. ; 윤주연, 『조선학생동지회약사』, 피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