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기 白世基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충남 공주(公州)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26년 건아단 창립, 1928년 조선농우연맹 가입, 계림농흥사와 조선개척사로 조직 개편
관련 사건
수원 개척사 사건
관련 조직
수원고등농림학교 건아단, 조선농우연맹, 계림농흥사, 조선개척사
생애
1907년 9월 14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계룡면(鷄龍面) 부암리(扶岩里, 현 계룡시 신도안면)에서 태어났다. 1926년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 임학과에 입학한 뒤, 그 해 여름 교내 기숙사에서 한국인 학생 모임인 ‘조선인학생 담화회(談話會)’ 회원들과 함께 비밀결사 건아단(健兒團)을 창립하였다. 건아단은 농림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전 인구의 70%가 넘는 농민대중을 계발함으로써 신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민족사회에 이바지하고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여겼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만든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수원군(水原郡) 안룡면(安龍面) 고견리(古牽里) 등지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한편, 단군 기원을 사용하며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1927년 9월 2학년 당시 강원도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일본인의 대규모 농장을 보고 분개하여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3학년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건아단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게 하는 한편, ‘한국인에 의한 조선 농촌 개발’을 적극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 강연 등 계몽활동을 전개할 때,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한전종(韓典鍾)이 연사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불온한 사상’을 불러일으킨다며 강연을 중지시켰고 한전종은 무기정학 처분을 당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건아단 단원들과 함께 일제에 조직이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조직의 명칭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개칭하였다. 그 뒤 건아단 출신 김성원(金聲遠)이 김해공립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1928년 여름 수원농림학교 뒷산인 여기산(麗妓山)에 올라가 계림농흥사를 다시 조선개척사로 새롭게 개편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조사가 확대됨에 따라 조선개척사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자, 육동백(陸東百)·김찬도(金燦道)·김익수(金益洙)·황봉선(黃鳳善)·김민찬(金玟賛)·남영희(南榮熙)·고재천(高在千·권영선(權永善)·우종휘(禹鍾徽)·김봉일(金奉日)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28년 9월 15일 수원지청 검사분국을 거쳐 이틀 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면소를 받았다. 풀려난 후 1931년 3월 수원농림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1933년 1월 경상북도 산림과 도기수, 공주농업학교 교사를 지냈다. 1945년 8월 광복 후 농림부 산림국 조림과장과 임산과장을 거쳐 한국축산업협동조합 이사장과 영림공사 사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매일신보』, 1928. 9. 18, 1930. 2. 21, 1931. 3. 25, 1933. 1. 9. ; 『조선총독부 관보』, 1931. 4. 1, 1936. 5. 25.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65. ; 서울농대, 『수원농학』,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9권, 1977. ; 역사학회, 『한국근대민족주의운동사연구』, 일조각, 1987. ; 김호일, 『일제하 학생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