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흠 金相欽

학생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울산(蔚山)
출신지
전북 고창(高敞)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1939~1941년 조선학생동지회 회장

관련 조직

조선학생동지회

생애

1919년 10월 27일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부암면(富安面) 봉암리(鳳岩里)에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재학하던 1939년 12월 서울 사직동(社稷洞)에 있던 도정궁(都正宮)에서 동교생(同校生) 서영원(徐泳源)·윤주연(尹柱淵)·김재황(金在璜)·김영하(金永河)·이동원(李東元)·민영로(閔泳魯) 등과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 대표 백재호(白在鎬) 등 4명과 함께 학생 항일 결사인 조선학생동지회(朝鮮學生同志會)를 결성하였다. 이 자리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조선학생동지회는 국내의 주요 도시를 비롯해 도쿄 등 해외 유학생 사이에도 하부 조직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여, 1942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국내외에서 일제히 「조선독립선언문(朝鮮獨立宣言文)」을 발표하고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 사이에 남한산성(南漢山城), 서대문구 냉천정(冷泉町) 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경기도 고양의 벽제관(碧蹄館) 등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주도하면서 동지 규합과 조직 확대에 힘을 쏟는 한편 거사 계획을 준비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활동을 하던 중 1941년 7월 하부 조직인 원산상업학교(元山商業學校) 조직원이 연락차 서울로 오다가 일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같은 해 9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도 퇴학당하였다. 이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함흥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같은 해 12월 19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1943년 3월 17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는 공로를 인정하여 추가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언론계·재계·정계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동아일보사 편집부장, 민주일보사 편집국장, 부산방직회사 상무이사, 한국금융공업회사 사장 등을 지냈다. 언론계에서 활동하면서 1950년 10월 14일 발족한 한국신문기자협회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民議院) 선거 때 고창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그해 7월 2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민정당(民政黨)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그해 12월 17일부터 1967년 6월 30일까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특히 제6회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 국회 재경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밖에도 민정당 상무위원 및 전라북도지부 부위원장, 민중당(民衆黨) 전라북도 제9지구당 위원장 및 재정금융위원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學生同志會略史」. ; 『大韓民國人物聯鑑』, 靑雲出版社, 1967. ; 이기화 편저, 『고창의 맥』, 고창문화원, 1991. ; 『大韓民國議政總攬』, 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 ; 경기도사편찬위원회 편,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