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직 金圭直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경남 동래(東萊)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애국장(1996)
주요 활동
1926년 동래독서회 참여, 1927년 부산제2상업학교 혁조회 결성, 1928년 1월 동래소년회 부흥, 1928년 4월 동래소년동맹 창립 집행위원장, 1928년 7월 경남소년연맹 중앙위원
관련 사건
1928년 혁조회 사건
관련 조직
동래독서회, 혁조회, 동래소년동맹, 경남소년연맹, 조선소년총연맹
생애
1909년 2월 1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부산제2상업학교에 재학하던 1926년에 동인지 『여문(麗文)』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같은 학교의 양정욱(梁正彧)·윤태윤(尹兌潤)·윤호관(尹昊爟), 동래고등보통학교생 박인호(朴麟浩)·최두해(崔斗海)·최정해(崔貞海)·송경희(宋景熺) 등과 함께 동래독서회를 결성하였다. 동래독서회(東萊讀書會)가 매월 정기 회합을 하고 월간지를 만들어 비밀리에 학우들에게 배포하며 동지 규합에 나설 때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유진흥(兪鎭興)과 같은 또래의 일반인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독서회의 규모를 확대해 나갔다. 그해 가을 무렵 동래경찰서가 독서회 활동을 포착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독서회 관련 문서를 소각 처리하고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지하였다. 같은 해 가을 무렵 동래독서회의 구성원을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고보로 나누고, 활동을 지속해서 해나가기로 하였다. 이에 모교인 부산제2상업학교에 소속되어 독서회 후속 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산제2상업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일제를 부인하고 경제 조직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혁조회(革潮會, 일명 黑潮會)로 변경할 때 함께하면서, 기관지 『흑조』의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혁조회는 동래독서회 구성원들과 1925년 6월 불교소년회와 기독소년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동래소년회와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뒤 동래소년회는 동래독서회 회원과 연결되면서 1928년 1월부터 활동의 부흥이 가능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3월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연맹으로 개편되는 것에 영향을 받아 1928년 4월 29일 동래소년회는 송달야학교 강당에서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임시총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동래소년회를 해산하고 동래소년동맹을 창립할 때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문상환(文相煥)·추월순(秋月洵)·이윤상(李潤祥)·박기덕(朴基德)·정문규(鄭汶奎)·전수근(田守根)·권성봉(權成奉)·윤호권(尹昊權) 등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시에 추월순·박기덕(朴基德) 등과 함께 경상남도소년연맹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래소년동맹의 활동 방향은 창립총회에서 결의된 사항에 따르면, 소년총동맹 가맹·어린이날 기념·반동분자 박멸·자체 교양·경남소년연맹 조직 발기·소년잡지 경영·미신타파·문맹 퇴치·여자소년동맹 조직 촉성 등으로 설정되었다. 1928월 7월 8일 동래소년동맹이 마산소년동맹과 함께 조선소년총연맹 경남도연맹 결성을 주도할 때 준비위원장이 되어 윤병수(尹炳洙) 서무재정부 위원 등과 중심적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래소년동맹 집행위원장, 경남소년동맹 준비위원, 조선소년총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1920년대 후반 소년 운동의 중심에 섰다. 혁조회는 1928년 5월 1일 함흥고등보통학교에서 식민지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의 동조 투쟁을 조직하였다. 이에 부산제2상업학교의 3·4학년생을 비롯한 전교생이 6월 18일부터 한일 공학제 반대, 일본인 교장 사퇴, 한국어 교수, 한국어 신문 잡지의 도서실 비치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휴교를 단행하였다. 또한, 혁조회는 독서회의 또 다른 구성원이었던 동래고보 학생들과 연계하여 동래고보의 동맹휴교를 끌어냈다. 동래고보 학생들은 일본인 교원 배척, 한국어 시간의 증가, 교내 강연회에서 한국어 사용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부산 제2상업학교의 동맹휴교는 전교생 450명의 85%를 웃도는 188명의 퇴학자와 198명의 무기정학자를 내며 9월 신학기를 맞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반면, 동래고보의 동맹휴교는 6월 21일경 일단락되었다. 함흥고보 동맹휴교 동조 투쟁 과정에서 퇴학당한 혁조회 양정욱이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던 길에 관부연락선에서 고등계 형사의 검문 때 소지하고 있던 수첩에서 혁조회 관련 메모가 발각되어 조직이 드러났다. 1928년 10월 혁조회 사건으로 구성원 9명과 함께 동래경찰서에 체포되어 노덕술(盧德述) 고등계 주임의 고문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29일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9년 2월 13일 혁조회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에서 예심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과 열악한 수감 생활로 인해 부산형무소에서 급성폐렴으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김승, 「한말·일제하 동래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지역과 역사』 6, 2000.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 9권, 1977. ; 『동아일보』 1928.7.5, 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