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쾌복 權快福

학생운동 독립장(196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경북 칠곡(漆谷)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독립장(1963)

주요 활동

1939년 백의단 조직과 단장 역임, 1941년 다혁당 조직 후 당수로 활동

관련 사건

왜관사건

관련 조직

백의단,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다혁당

생애

1921년 2월 2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에서 태어나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에서 자랐다. 밀양공립보통학교(密陽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7년 관립 대구사범학교(官立大邱師範學校)에 9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9년 8월 학생근로보국대로 동원되자, 배학보(裵鶴甫)·조강제(趙崗濟)·최영백(崔榮百)·문덕길(文德吉)·김성권(金聖權)·최태석(崔泰碩) 등 20여 명의 학우와 함께 왜관심상소학교(倭館尋常小學校)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왜관사건의 진상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왜관사건은 학생근로보국대로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민족 차별 대우에 항의하여 일본인 교사를 구타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학생 7명이 퇴학당하고 11명이 정학 처분을 받았다. 조강제의 사회로 진행된 학생들의 모임에서 회합의 목적을 설명하였다. 모임을 통해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 행동 통일을 도모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이를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당시 학생들이 한민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 백의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백의단(白衣團)으로 명칭을 결정하였다. 백의단은 첫째 비밀 엄수, 둘째 명령 복종, 셋째 자기 책임 완수, 넷째 친목과 단결 도모라는 조직 운영 방침을 정하였다. 평소 학우 사이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아 백의단 단장에 선임되어 조직을 이끌었다. 백의단을 결성한 후 단원들과 한국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잡지 등을 읽은 후 팔공산 등지에서 모임을 하면서 결속을 다졌고, 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명확한 목적 의식의 부재, 운동 방침의 미비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지 못하였다. 1941년 2월 중순 동기생 유흥수(柳興洙)와 최영백·김효식(金孝植)·김성권·이도혁(李道赫)·문덕길·최태석·배학보·이종악(李鍾岳)·서진구(徐鎭九)·이주호(李柱鎬)·박호준(朴祜雋)·이홍빈(李洪彬) 등과 함께 모여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문예·예술·운동 등 각 부문의 실력을 양성하여 한국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킬 것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이 자리에서 다혁당의 당수 겸 예술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주요 임원은 부당수 배학보, 총무부장 최영백, 문예부장 이동우, 운동부장 이도혁 등이었다. 다혁당은 1940년 11월 박효준(朴孝濬)·유흥수 등이 표면상 문예 활동을 표방하면서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실력을 양성하자는 취지로 조직한 대구사범학교 내 비밀결사 문예부가 1941년 초 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논의하던 시점에, 백의단도 그동안 활동이 부진하였는데 동지를 확대 규합하여 비밀결사를 재조직하자는 결정을 바탕으로 출범하였다. 다혁당의 구성원들은 모두 5학년생으로 독립 이후 신국가 건설을 위해 각자의 관심이나 전공 영역을 고려하여 전문 분야별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법률·정치·문학·역사·경제·철학 등의 형태로 조직 체계를 세웠다. 다혁당 규약은, ‘첫째 당원은 비밀을 엄수한다. 둘째, 당원은 매월 1회 회합하고 당수 부당수 및 각 부장은 매주 1회 이상 회합한다. 셋째, 각 부장은 책임지고 하급생을 지도 양성한다. 넷째, 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복종한다. 다섯째, 당원은 결당식에 참가한 자에 한하며 새로운 가입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것’ 이었다. 다혁당의 일원으로서 한글로 된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윤독하며 독후감을 발표하였다. 또 국내외 정세에 대해 서로 토론하면서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공휴일을 이용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할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훈련도 하였다.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을 퇴치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다혁당의 당수로서 3월 중순부터 5월 상순까지 당원의 하숙방 등에서 회합하며 각 부서의 활동 상황을 점검하는 한편 확대 강화책을 논의하였다.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의 집에서 문예지 「반딧불」이 발각되었고 조사 과정에서 다혁당의 조직도 노출되었으며 이로 인해 당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가 1945년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통신사에서 근무하였고 광복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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