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성 姜大成

학생운동 건국포장(2003)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진주(晋州)
이명(별칭)
강진성(姜晋成), 죽본대성(竹本大成)
출신지
경남 함안(咸安)
운동계열
학생운동
포상훈격
건국포장(2003)

주요 활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동조 시위, 1937년 조선유학생연학회 조사부 위원

관련 사건

광주학생운동

관련 조직

조선유학생연학회

생애

1910년 5월 10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소포리(小浦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형과 아우가 있으며, 집안은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넉넉한 편이었다. 1929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듣고 동조 시위를 계획·주도하였다. 12월 8일 자신의 집에서 심홍택(沈弘澤)·강상덕(姜相德)·황한희(黃翰禧) 등과 모여 총독부 학무국장 및 중앙고보 교장에게 제출할 진정서 2통을 작성하였다. 진정서는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 선전부장인 중앙고보 4학년 김순희(金淳熙)의 조언에 따라 직접 그 자리에서 작성하였으며, 그 내용은 ‘광주학생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자를 석방하고 언론·집회·출판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4학년생 교실에 들어가 진정서를 낭독하고 광주 학생들에 동조하여 동맹휴교를 하자고 연설하였다. 이날 중앙고보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광주 학생 만세’ 등을 외치며 동맹휴학을 결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12월 12일 체포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렀으며, 1930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는 가업을 돌보다가 1935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경제학과에 다녔다. 1936년 6월 25일 도쿄시(東京市) 간다구(神田區)에서 메이지(明治)대학 학생 박용칠(朴容七)·우삼흥(禹三興), 니혼(日本)대학 학생 장재성(張載性) 등 약 30여 명과 함께 회합하여 각 학교 한국인 학생의 연락기관으로 조선유학생연학회(朝鮮留學生硏學會)를 결성하였다. 1937년 2월 1일 임시총회에서 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강연회 개최, 뉴스와 회보 발행 등의 활동에 참여하여 회원의 민족의식 앙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8년 2월 20일 박용칠, 장재성 등과 함께 공산 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검거되었다. 12월 1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40년 9월 17일 종로경찰서에 검속(檢束)된 바 있는데, 혐의 내용은 알 수 없다. 1941년 말 재일본경성중앙고보동우회(在日本京城中央高普同友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그해에 와세다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함경북도 청진에서 조선광업주식회사 청진지점 경리과장으로 일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30.12.19. ; 경찰청, 「姜大成 身分帳指紋原紙」. ; 국사편찬위원회 편,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52 : 同盟休校事件 裁判記錄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가보훈처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3집, 공훈전자사료관. ; 국가보훈처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3집, 공훈전자사료관. ; 『중외일보』 1930.9.24, 1930.9.27. ; 「學前 관계자 10명 執行猶豫로 出獄」, 『조선일보』 1930.12.21. ;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광주학생독립운동사』, 국제문화사, 1974. ; 최성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 고려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