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화 陳光華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본명 : 김창화(金昌華)
출신지
평남 평양(平壤)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훈격
애국장(1993)
관련 사건
마전장전투
생애
평안남도 평양(平壤)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1년생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김창화(金昌華)이다. 1925년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숭덕중학교 재학 중 독서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숭덕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1930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오주중학(五州中學)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한인 학생들의 비밀 조직인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3년 오주중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8월 광저우(廣州)의 쭝산(中山)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쭝산대학 재학 중 조선인용진학회(朝鮮人勇進學會)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5년 여름에는 중국공산당과 연계된 중국 청년항일동맹의 간부가 되어 중국 학생들의 항일운동에 동참하였다. 1936년 7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0월에 쭝산대학 내 당지부 결성에 참여하고 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쭝산대학 내 국공 내전의 중지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운동인 ‘12.12학생운동’에 주요 지도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러나 광동 군벌 진제당(陳濟棠)의 탄압을 받아 1937년 1월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37년 6월 쭝산대학을 졸업하고, 광저우 근교 농촌의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중국공산당 지도하에 광저우 청년 항일 선봉대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9월에는 옌안(延安)으로 이동, 중앙당학교(中央黨學校)에 입학하여 공산주의 사상과 이론을 학습하였고, 졸업 후인 1938년 진동남(晋東南) 지구에 파견되어 선전 극단의 단장을 맡았다. 1939년 4월 진기로예변구(晉冀魯豫邊區)에 파견되어 팔로군(八路軍) 야전군 사령부 정치부에서 근무하였으며, 화베이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진기로예변구 당학교 교무 과장, 조직 과장 겸 총지서기(總支書記) 등을 지냈다. 1941년 화베이조선청년연합회 진기로예지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의용대 화베이지대(華北支隊) 정치위원 또는 중앙 특파원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그해 8월 16일부터 조선의용대 화베이지대가 자체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개설한 간부 훈련반에서 교원으로 참가하였다. 1942년 1월 조선혁명청년간부학교 건립에 참여하여 부교장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태항산 일대 일본군의 소탕전(掃蕩戰)에 맞서 반소탕전이 전개되었고, 5월 28일 새벽 산시성(山西省) 동남부 마전장(麻田莊) 화왕산(花王山)에서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在支不逞鮮人團體統計表」, 『特高月報』, 1943. 1.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7, 2009. ; 『解放日報』, 1942. 9. 20. ; 楊昭全 等編, 『關內地區朝鮮人反日獨立運動資料彙編 - 1919~1945』 下, 遼寧民族出版社, 1987. ; 이정식·한홍구 엮음, 『항전별곡-조선독립동맹 자료Ⅰ』, 거름, 1986. ; 김주용, 「중국 언론에 비친 조선의용대 -『救亡日報』,『解放日報』의 기사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104, 한국사학회, 2011. ; 염인호,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 나남출판, 2001. ; 김영범, 『혁명과 의열 - 한국독립운동의 내면』, 경인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