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중 金祺重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김희중(金希仲)
출신지
전북 남원(南原)
운동계열
의병
포상훈격
애국장(1991)
주요 활동
1907~1909년 양인숙 의진에서 군자금모집 활동
관련 사건
후기의병
생애
1871년경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생조벌면(生鳥伐面) 방동(현 남원시 대강면 방동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희중(金希㑖)이다. 1910년 당시 40세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시작된 정미의병 초기에 양인숙(楊仁淑)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의병장 양인숙은 최익현(崔益鉉)의 문인인 이석용(李錫庸) 의병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이후 독립 부대를 결성하고 항전하였다. 양인숙의 지휘하에 1907년 10월 총기로 무장한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남원 견소곡면(見所谷面) 선암촌(仙岩村) 이장(里長) 김영보(金永甫)를 찾아가 우리 의병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라고 요구하여 엽전 80냥을 징발하였다. 1908년 9월 8일에는 의병장 양인숙 및 동료 의병들과 전북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갈재(葛峙)를 통과하던 중 순창주재소(淳昌駐在所) 순사 박경홍(朴敬弘)을 발견하였다. 의병장 양인숙은 순사가 의병부대의 이동 경로를 탐지하려는 것임을 의심하고, 이공영(李公榮), 장석봉(張石奉) 등과 함께 처단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장석봉, 이공영과 함께 순사를 사살하였다. 같은 해 10월(음력 9월)에는 양인숙 및 동료 의병 50여 명과 함께 전북 임실군 덕치면(德峙面) 일구지리(日九池里) 이장 신정로(申正老)에게 의병임을 밝히고 군자금으로 엽전 백 냥을 징발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09년 11월 22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10년 1월 1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고, 같은 해 2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역시 기각되었으며, 3월 18일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 1909.11.22. ; 「판결문」, 대구공소원, 1910.1.18. ; 「판결문」, 고등법원 형사부, 1910.2.2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의병항쟁재판기록,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