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金圭植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김해(金海)
이명(별칭)
호 : 노은(蘆隱)
출신지
경기 양주(楊州)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독립장(1963)
주요 활동
1907년 허위 의병부대에 참가,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 서명, 1920년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청산리 전투 참가, 1922년 고려혁명군 총사령관, 1925년 신민부 참가, 1927년 신민부 군사부 위원, 1926년 고려혁명당 중앙위원, 1930년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관련 사건
후기의병, 대한독립선언서
관련 조직
13도창의대진소, 북로군정서, 고려혁명군, 신민부, 고려혁명당, 한국독립당
생애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사노리(四老里, 현 구리시 사노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노은(蘆隱)이다. 아버지는 영선(永先)이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경 주명래(朱明來)와 결혼하여, 1901년 장남 현욱(顯旭), 1904년 차남 현성(顯聲), 1907년 3남 현의(顯毅), 1915년 장녀 현태(顯泰), 1918년 4남 현륜(顯崙)이 태어나, 4남 1녀를 두었다. 1902년 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에 임명되었다. 1906년 시위대에 입대하여 부교(副校)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현덕후(玄德厚)와 양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의병장 허위(許蔿) 부대에 합류하여, 같은 해 9월부터 포천·연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양주에서 결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인영(李仁榮)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사령장(使令將)을 맡아 1,5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였다. 장단과 양주 등지를 무대로 일본 군경과 싸웠다. 1908년 6월 서울진공작전 때 허위와 함께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08년 8월 경성공소원(京城公訴院)에서 1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2년 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10년 9월 5일자로 사면되었다. 1917년 양주군 구리면 동구릉 삼림감시원을 역임하였으며, 1919년 1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조합장을 지내다가 1919년 3·1운동 전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망명 후 중광단을 토대로 설립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중광단을 이끌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선도하였다. 북로군정서의 군사력은 북간도 지역뿐만 아니라 서간도 지역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920년 8월 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弘國)·김상운(金相雲) 등과 왕칭현(汪淸縣) 서대파 십리평에 설립한 북로군정서 단기 속성 군관학교인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의 훈련 과정은 6개월 속성이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군사학·총검술 등을 교수하였으며, 축성교범 등의 교재 등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군사훈련은 구한국 군대식의 훈련을 기본으로 하고 3,000평 연병장을 만들어 사격 훈련 등의 실질적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9월 배출된 제1회 졸업생 300명 중 150명으로 지방 시찰 여행대를 조직하였으며, 나머지 150명은 새로 모집한 100명 및 사령부 경비대와 합하여 3개 연대 규모의 400명 병력 1개 대대를 편성하였다. 새로 편성된 보병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도 주변 지형과 뛰어난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지휘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운평전투에서 펼친 활약은 어랑촌전투에서도 빛을 발했지만, 일본의 지속적인 정규군 투입과 보급선 확보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密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11월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으로 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며, 이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모장에는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이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초 연해주 이만에 도착한 독립군들은 무장해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자유시로 이동하거나 다시 만주로 귀환하였다. 김좌진·이범석과 함께 옌지(延吉)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2년 8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주간부 내에 조직된 고려부가 연해주에 산재한 ‘고려의병대’ 통일 문제를 러시아인 연해주의병대 혁명군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9월에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지도 아래 연해주고려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으며, 9월 5일 연해주 고려인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결성되었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제1본대총사령부의 총사령으로 677명의 병력을 지휘하였고, 관할 지역은 포시에트 훈춘구역이었다. 10월 연해주 백위파 잔당을 몰아내는 최후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전선에서 러시아 적군의 우수리스크를 점령 전투를 지휘하였다. 1922년 11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총사령부 편제를 개편할 때 군정위원장 최호림, 기병대장 이범석 등과 함께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 11월 15일부터 고려혁명군이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부하 200여 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무링현(穆棱縣)으로 이동하였으나, 중국 관헌에 무장해제당하였다. 1923년 초 고평(高平)·이범석과 함께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를 실시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중국 지방 관헌들의 압박으로 근거지를 헤이룽장성 닝안현(寧安縣)으로 이전한 뒤에는 부하 100여 명을 선발하여 동경성(東京城) 일대 관유지를 임대 개간하였다. 1923년 2월 노농 정부로부터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받아, 중동선 철도 및 남만주철도 연선의 친일파 및 일본 관헌을 척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60여 명으로 구성된 결사대와 모연대를 조직, 간도 및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사상 선전을 꾀하였다. 3월 5일 각자 권총 1정과 공채증권을 휴대한 결사대와 모연대를 국내로 보내 함경북도 명천군과 경성군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토록을 명령하였다. 1923년 5월 김좌진·현천묵과 함께 기진회(期進會)를 조직하고, 오성륜(吳成崙)·최웅렬(崔雄烈)·한상오(韓尙五) 등으로 암살단을 편성하여 국내에 파견하였다. 같은 해 5월 현천묵·조성환·김좌진·나중소·이장녕·이세영(李世永) 등 79명 명의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조 지지 선언문을 발송하였다. 11월에는 이범석·조성환(曺成煥) 등과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1924년 10월 독립군단을 재수습하여 통빈현(同賓縣)에 본부를 두고 김좌진과 함께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총재에 현천묵이 선임되었으며, 이때 사령관에 부임하였고, 이범석은 군사부장이었다.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한독립군으로 명명하였으며, 중국 우페이푸(吳佩孚) 군벌을 상대로 군자금과 무기 구입을 도모하였다. 1925년 부인 주명래를 비롯하여 4남 1녀를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링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김좌진·김혁(金爀, 김학소)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고, 1926년 3월에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김좌진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팡정현(方正縣)과 옌쇼우현(延壽縣) 및 주허현(珠河縣, 현 尙志市)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7년 2월 신민부 내 민정파(民政派)로 구성된 고려국민당(高麗國民黨)에서 군사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고려국민당은 통빈현 소량자(小亮子)에 본부를 두고 주허현과 통빈현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9년에는 국민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이장녕·홍진·지청천·조경한·황학수·신숙 등과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를 모체로 하여 중동선 연선(沿線)의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인재 양성과 운동 자금 확충을 위한 활동에 진력하였다. 한국독립당은 강령으로 삼본주의(三本主義)의 바탕 아래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각지의 주민회를 조직화하여 일반주민을 결속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표면기관으로 1931년 2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다. 1931년 부인 주명래 등 가솔들과 옌쇼우현으로 이주하였으며, 그해 3월 한족자치연합회 본부가 있던 주허현 이붕해(李鵬海)의 집에서 신숙(申淑)·지청천 등과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백운봉·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유해는 주허현 마이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 民族運動硏究所 編, 『民族獨立鬪爭史 史料 : 海外篇』, 輿論社, 1956.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東京 : 原書房, 1967.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3, 東京 : 原書房, 1967. ; 崔衡宇, 『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第1輯, 東方文化社, 1945.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문화사, 1970. ; 채근식, 『武裝獨立運動秘史』, 大韓民國公報處, 1985. ; 채영국,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