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파 洪波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홍계신(洪繼信)
출신지
평북 정주(定州)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훈격
애국장(1991)
주요 활동
1927년 적박단 집행위원, 1928년 혼하노농청년연맹 집행위원장, 1942년 광복군 화북지구 지하조직과 초모공작 활동
관련 조직
정의부, 한국광복군, 적박단, 고려청년회
생애
1902년 1월 30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정주면(定州面) 성외동(城外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홍계신(洪繼信)이다.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수학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광복군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평북 정주에는 1907년 당시 민족정신의 고취와 인재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오산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오산학교 3학년 시절 학교 교직원 간의 불미스러운 행위가 지속되는 것을 비판하며, 이러한 행위를 하는 교사의 반성을 촉구하고 학교의 기풍을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1921년 (음)5월 초부터 『개혁공보(改革公報)』라는 책자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6월 20일경 『개혁공보』의 발간을 주도하였던 7명의 학생이 발각되어 각각 출학·무기정학·2주일 정학의 처분을 받았는데, 이때 출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서울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8월 21일 서울 견지동(堅志洞) 청년회관에서 좌익단체인 적박단(赤雹團) 집행위원회가 개최될 때 4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적박단은 같은 해 9월 3일 해산되었고 이후 만주지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1월 8일에는 중국 펑톈(奉天)에서 개최된 재만조선인대회에 무순혼하노농청년회(撫順渾河勞農靑年會)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정의부에 가입하였고 그 산하의 덕성학교(德成學校) 교사로 활동하던 중 남만청년총연맹(南滿靑年總聯盟)에 참가하였다. 1928년 10월에는 혼하노농청년연맹(渾河勞農靑年聯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11월 14일 펑톈 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된 후 1년동안 옥고를 겪고 풀려났다. 당시 죄명은 ‘치란위반(治亂違反)’인데, 덕성학교의 교사로 불온사상을 고취하고 남만청년총연맹에 가입하였으며, 혼하노농청년총연맹을 조직하여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 체포 사유였다. 이후는 홍파(洪波)라는 이명(異名)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1월 19일 『동아일보』 푸순(撫順)지국 기자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남만총지국장(南滿總支局長)이 되었다가 1933년 푸순지국장을 사직하였다. 1936년에는 화북지방으로 건너갔다. 1942년 이후로는 광복군에 소속되어 화북지구 지하조직 구성과 초모(招募)공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일본군의 기밀을 탐지하고 한국독립당을 조직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인 1945년 9월 9일에는 임시정부 화북대표부 주석인 조강(趙剛)의 비서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京種警高秘 제9329호 赤雹團 執行委員會의 件」, 1927. 8. 23 , 『思想問題에 관한 調査書類 3』. ; 『조선일보』, 1928. 11. 29. ; 『매일신보』, 1928. 11. 23. ; 『동아일보』, 1928. 1. 14. 10. 30, 11. 25, 1930. 1. 19, 1931. 1. 9, 1933. 4.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