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독립임시사무소 터
위치 정보
주소 (한글)
상하이 황포구 회해중로 717호 일대
주소 (현지)
上海市 黄浦区 淮海中路 717号 일대
역사적 의의
1919년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의 ‘최고기관’ 수립을 준비하기 위해 상하이에 설치한 기구인 독립임시사무소 터
설명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의 독립이 선포되었다. 독립이 선언되자 이에 조응하는 '독립국', 즉 독립운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최고 지도기관'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최고지도기관'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할 수 있는 임시기구가 필요했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마련된 독립임시사무소(獨立臨時事務所)가 바로 그것이었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 조직된 독립임시사무소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다. 3・1운동 소식을 파리강화회의와 국외 교포들에게 선전하는 일과 국내외 주요 민족운동단체의 대표자들을 상하이로 결집시켜 독립운동의 향후 진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일,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최고 지도기관’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독립임시사무소의 조직과 운영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국내 3・1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민족대표들이 파견한 현순(玄楯)과 상하이 여운형(呂運亨)을 포함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자들, 미주에서 건너온 여운홍(呂運弘)과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중 건너온 이광수(李光洙)와 최근우(崔謹愚) 등이었다.
이중 현순은 독립임시사무소의 조직과 운영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19년 2월 17~18일경 3・1운동 준비를 위한 논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승훈(李昇薰)과 함태영(咸台永)·이갑성(李甲成) 등이 모인 이 회합에서는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건의서 송부를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각국에 독립청원 문서 발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이를 위해 상하이로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가 바로 현순이었다. 또한 현순은 국내 출발 당시 이승훈으로부터 받은 2,000원을 독립임시사무소의 설치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국내 민족대표가 파견한 대표자라는 상징성과 활동에 필요한 자금 지원은 현순이 독립임시사무소의 총무로서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현순은 독립임시사무소의 총무에 선임되었다. 그는 상하이 주재 각국 공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상황을 현지 언론에 알렸다. 신한청년당이 2월에 파견한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에게도 소식을 전달했다. 이와 동시에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 수립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3월 26~27일경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최고 지도기관’ 수립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독립임시사무소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대부분 이 회의에 참여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최고 지도기관’ 조직을 주장하였다. 반면 현순과 이광수는 즉각적인 조직에 반대했다. 이들은 ‘최고 지도기관’ 조직에는 동의했다. 다만 민족대표 3인의 의사를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대표의 의사 없이 ‘정부’를 조직하면 미주나 만주지역 등지의 한인들이 모두 ‘정부’수립을 추진했을 때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 주요 논리였다. 따라서 이들은 서울에 파견했던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최고 지도기관’ 조직체의 성격과 형태를 놓고도 이견이 있었다. ‘최고 지도기관’의 형태를 ‘임시정부’ 또는 ‘정당’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전개한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현순과 최창식 등이 주장한 것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임시정부’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고, ‘임시정부’를 조직함으로써 공개적인 지원을 획득하여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후자는 주권과 영토 및 인민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 형식에 집착하기보다 ‘정당’을 조직하는 것이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를 주장한 인물은 여운형과 이광수 등이었다. 독립임시사무소 구성원들은 ‘최고 지도기관’ 수립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이광(李光)·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이광수·현순 등으로 구성된 ‘8인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중 이동녕 등 5명은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에서 함께 건너온 인물들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부류였다. ‘8인 위원회’는 다수의 회의를 통해 ‘최고 지도기관’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상호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후 국내와 연계가 어렵게 되자 독자적인 수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4월 초순 이동녕과 이시영·이회영(李會榮)·신헌민(申憲民)·신규식·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조소앙·이광수·이광·현순 등이 상하이 남경로(南京路) 여관에서 회합하 ‘임시정부’ 조직안을 토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합의하지 못하고 산회하고 말았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빨라졌다. 3월 17일 서울에서 이갑성(李奎甲)과 홍면희(洪冕憙) 등이 모여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고,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道) 대표자대회를 열고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상하이에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가 3월 17일 내외적으로 공표된 사실 역시 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수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임시의회’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회합을 가졌다. 회합에는 각 지방 출신 대표 29명이 참석했다. 회의의 명칭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정하고 회의를 이끌어갈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로써 독립임시사무소는 그 역할을 마치고 해소되었다. 독립임시사무소는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최고지도기관’,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그동안 보창로 329호가 독립임시사무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임시정부의 공식자료인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과 일제 측이 작성한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등의 자료를 통해 규명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임에도 프랑스 조계의 확장과 지번의 변화로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최근 독립임시사무소의 위치를 명확하게 비정한 연구성과가 나왔다. 김광재는 1920년에 간행된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도를 발굴하여 보창로 329호 독립임시사무소 자리를 입증하였다.
보창로 329호 독립임시사무소 터는 현재 지하철 13호선 회해중로역 1번 출구 맞은편 회해중로 717호 부근이다. 당시 건물은 모두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시정부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장소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에 조직된 독립임시사무소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였다. 3・1운동 소식을 파리강화회의와 국외 교포들에게 선전하는 일과 국내외 주요 민족운동단체의 대표자들을 상하이로 결집시켜 독립운동의 향후 진로를 모색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일,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최고 지도기관’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독립임시사무소의 조직과 운영에는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국내 3・1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민족대표들이 파견한 현순(玄楯)과 상하이 여운형(呂運亨)을 포함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자들, 미주에서 건너온 여운홍(呂運弘)과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중 건너온 이광수(李光洙)와 최근우(崔謹愚) 등이었다.
이중 현순은 독립임시사무소의 조직과 운영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19년 2월 17~18일경 3・1운동 준비를 위한 논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승훈(李昇薰)과 함태영(咸台永)·이갑성(李甲成) 등이 모인 이 회합에서는 독립선언, 그리고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건의서 송부를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각국에 독립청원 문서 발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민족대표들은 이를 위해 상하이로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가 바로 현순이었다. 또한 현순은 국내 출발 당시 이승훈으로부터 받은 2,000원을 독립임시사무소의 설치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였다. 국내 민족대표가 파견한 대표자라는 상징성과 활동에 필요한 자금 지원은 현순이 독립임시사무소의 총무로서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현순은 독립임시사무소의 총무에 선임되었다. 그는 상하이 주재 각국 공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상황을 현지 언론에 알렸다. 신한청년당이 2월에 파견한 파리강화회의 대표 김규식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에게도 소식을 전달했다. 이와 동시에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기관’ 수립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3월 26~27일경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어갈 ‘최고 지도기관’ 수립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독립임시사무소에 참여했던 인사들도 대부분 이 회의에 참여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최고 지도기관’ 조직을 주장하였다. 반면 현순과 이광수는 즉각적인 조직에 반대했다. 이들은 ‘최고 지도기관’ 조직에는 동의했다. 다만 민족대표 3인의 의사를 들어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민족대표의 의사 없이 ‘정부’를 조직하면 미주나 만주지역 등지의 한인들이 모두 ‘정부’수립을 추진했을 때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 주요 논리였다. 따라서 이들은 서울에 파견했던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최고 지도기관’ 조직체의 성격과 형태를 놓고도 이견이 있었다. ‘최고 지도기관’의 형태를 ‘임시정부’ 또는 ‘정당’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전개한 것이 그것이다. 전자는 현순과 최창식 등이 주장한 것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임시정부’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고, ‘임시정부’를 조직함으로써 공개적인 지원을 획득하여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후자는 주권과 영토 및 인민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정부’ 형식에 집착하기보다 ‘정당’을 조직하는 것이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를 주장한 인물은 여운형과 이광수 등이었다. 독립임시사무소 구성원들은 ‘최고 지도기관’ 수립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이광(李光)·조성환(曺成煥)·신석우(申錫雨)·이광수·현순 등으로 구성된 ‘8인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중 이동녕 등 5명은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에서 함께 건너온 인물들로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한 부류였다. ‘8인 위원회’는 다수의 회의를 통해 ‘최고 지도기관’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상호간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후 국내와 연계가 어렵게 되자 독자적인 수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4월 초순 이동녕과 이시영·이회영(李會榮)·신헌민(申憲民)·신규식·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조소앙·이광수·이광·현순 등이 상하이 남경로(南京路) 여관에서 회합하 ‘임시정부’ 조직안을 토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합의하지 못하고 산회하고 말았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움직임이 빨라졌다. 3월 17일 서울에서 이갑성(李奎甲)과 홍면희(洪冕憙) 등이 모여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고,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道) 대표자대회를 열고 임시정부 수립을 공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소식이 상하이에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가 3월 17일 내외적으로 공표된 사실 역시 한 요인이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수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임시의회’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회합을 가졌다. 회합에는 각 지방 출신 대표 29명이 참석했다. 회의의 명칭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정하고 회의를 이끌어갈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로써 독립임시사무소는 그 역할을 마치고 해소되었다. 독립임시사무소는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최고지도기관’,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그동안 보창로 329호가 독립임시사무소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임시정부의 공식자료인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과 일제 측이 작성한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등의 자료를 통해 규명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임에도 프랑스 조계의 확장과 지번의 변화로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최근 독립임시사무소의 위치를 명확하게 비정한 연구성과가 나왔다. 김광재는 1920년에 간행된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도를 발굴하여 보창로 329호 독립임시사무소 자리를 입증하였다.
보창로 329호 독립임시사무소 터는 현재 지하철 13호선 회해중로역 1번 출구 맞은편 회해중로 717호 부근이다. 당시 건물은 모두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시정부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장소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