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백 金成伯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함북 경성(鏡城)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애족장(2016)
주요 활동
1909년 8월 미주의 국민회 하얼빈지방회 회장,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 1910년~1912년 대한인국민회 하얼빈지방회 회장, 1920년 이루쿠츠크 조선인민회 찬성원으로 임시정부 원조금 제공, 1921년 치타의 극동공화국정부 한인부에서 활동
관련 사건
안중근 의거
생애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출신이며 1909년 당시 32세인 점으로 미루어 1878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김성백(金星伯)·김성백(金成白)이고, 러시아에 귀화한 뒤 러시아 이름은 치온 이와노위츄 킴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1867년 함북 종성읍(鍾城邑)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고 두 살 때인 1869년 가족과 함께 러시아령 연해주로 이주하여 17세 때인 1885년에 러시아정교로 개종하고 귀화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출생 연도와 출신지에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 가담 혐의로 심문을 받으면서 본인이 진술한 내용을 택하였다. 1898년부터 러시아의 동청철도(東淸鐵道) 건설에 참여하면서 연해주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철도공사 청부업 등을 하면서 상당한 재력을 갖게 되어 하얼빈 한인 사회의 유력자가 되었다. 철도공사의 노동자와 이주 한인들로 하얼빈에 한인 사회가 형성되면서 하얼빈 한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9년 8월 공립협회 하얼빈지방회가 설립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독립운동의 전개, 동족간의 상부상조 등을 목적으로 조직하여 이후 국내·만주·러시아 등지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공립협회가 1909년 2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를 결성하면서 하얼빈지방회도 그해 8월 국민회 하얼빈지방회로 개편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22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에 온 안중근·우덕순·유동하에게 26일 거사 직전까지 숙박을 제공하였다.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저격에 성공한 뒤 이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붙잡혀 11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이후에도 하얼빈에 온 안중근의 처와 아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고 뤼순(旅順)에서 안중근이 재판을 받을 때 의연금 모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0년 2월 미주의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재편하고, 그해 5월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의 결의로 시베리아와 남북만주에 지방총회를 건립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1910년 2월 대한인국민회 하얼빈지방회를 조직하여 그해 4월 미주 본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회장에 선출되었다. 1911년 9월 하얼빈에서 중동철도 연선을 따라 형성된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설립된 하얼빈지방회 등 9개 지방회를 통해 만주 일대의 대한인국민회 사업을 총괄하는 만주리아지방총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선출되었다. 특히 강제 병합한 뒤 러시아 경찰이 한인들을 일본 국적자로 분류, 체포하여 일본영사관으로 넘기는 일이 늘어났다. 이에 일제의 탄압을 피하는 방안으로 만주 각 지방회를 통해 지방회 회원뿐만 아니라 반일운동을 하는 한인을 대상으로 러시아 국적 취득을 위한 귀화 운동을 벌였다. 또한 1909년 4월 하얼빈에 세워진 민족학교인 동흥학교(東興學校)가 안중근 의거로 많은 교사들이 붙잡혀 문을 닫게 되자 학부형을 설득하여 그해 12월 다시 문을 열게 하였다. 이듬해 대한기독교 동흥학교로 개칭하고 1911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하얼빈 지방의 청년 40여 명을 모아 대한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1912년 7월 가쓰라 다로(桂太郞) 일본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길에 하얼빈을 통과하는 일정이 확정되었다. 그러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은 제2의 안중근 의거를 우려하여 ‘가쓰라암살음모’가 있다는 혐의를 씌워 러시아 당국에 하얼빈 밖으로의 추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일제의 압박을 받은 러시아 당국이 추방을 결정하였으나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1개월 후에 하얼빈 집으로 돌아와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러시아와 동맹관계를 맺게 된 일본은 또 다시 러시아 당국에 하얼빈에서의 추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결국 1916년 9월 이르쿠츠크로 추방되었다.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주하였다가 다시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이르쿠츠크조선인민회 찬성원(贊成員)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이르쿠츠크 한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30만여 루블을 보낼 때 10만 루블을 의연하였다. 그해 4월 레닌의 지시에 의해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완충국으로 시베리아 치타(知多)에 극동공화국이 세워지면서 극동공화국정부 한인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憲本 제349호, 在哈爾賓憲兵隊長ノ情報通報」, 1909.11.8·「兇行連累者調査報告顚末」, 1909.11.11, 국사편찬위원회, 『統監府文書』 7. ; 「機密鮮 제33호, 開拓里狀況報告件」, 1911.4.2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55호, 朝鮮人ノ露國歸化ニ關スル檄文飜譯送付ノ件」, 1911.6.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公 제5호, 當地朝鮮人國民會員ノ動靜ニ關スル件」, 1912.1.1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朝憲機 제891호, 哈爾濱ヨリ歸來鮮人ノ談片」, 1912.7.5,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大正元年十一月調 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1914.9.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57호, 排日鮮人ノ退露處分ニ關スル件」, 1914.12.2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送 제67호, 鮮人ノ排日運動根絶方ニ關スル件」, 1914.9.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在露鮮人排日運動根絶方ニ關スル件」, 1915.8.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政機密 제23호, 要注意鮮人表進達ノ件」, 1917.5.1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機密 제4호, 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 1920.1.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情報 제204호, 知多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 1921.5.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가보훈처,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13-日本篇(1) 亞洲第一義俠 안중근(1)』, 1995. ;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미주국민회자료집』 18, 2005. ; 이명화, 「하얼빈 한인사회와 김성백의 독립운동」, 『역사와 실학』 55, 역사실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