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겸 金萬謙

노령방면 애국장(2005)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러시아명 : 세레브랴코프 이반 스테파노비치(Серебряков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이명 : 세울로프(Сеулов)
출신지
러시아 연해주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애국장(2005)

주요 활동

1910년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 1911년 러시아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Далекая Окрайна)』의 서울 주재 특파원, 1912년 권업회 위원, 1917년 전로한족대표자회의 참가,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기관지 『청구신보』 편집인, 1918년 한민학교 교사, 1919년 3월 17일 연해주 3.1운동 주도, 1920년 대한국민의회 부회장, 1920년 5월 상하이에서 코민테른 동아비서부 설립, 산하 고려부 총괄, 한인공산당 조직, 1921년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중앙위원, 고려공산당 상해지방위원회 위원, 1923년 코민테른 조선문제위원회 위원, 1923년 연해주지방정부 한인문제전권위원, 1931년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학 설립

관련 사건

성명회 선언, 연해주 3.1운동, 연해주 4월참변

관련 조직

권업회, 성명회,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한국민의회, 한인공산당, 고려공산당, 코르뷰로

생애

러시아정교 세례명은 세레브랴코프 이반 스테파노비치(Серебряков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이며, 이명은 세울로프(Сеулов)로 서울의 러시아어 발음에서 따왔다. 러시아령 연해주 포세트구 브루시 마을에서 태어났다.단 다른 자료에 의하면 1886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는 의견이 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뒤, 마을의 한인 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 시립중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아내 지나이다 그리고리예브나 김-세레브랴코바(Знаида Григорьевна Ким-Серебрякова)와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립중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5-1906년 제1차 러시아혁명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러시아 원동의 한인들 사이에서 전개되던 항일운동에 가담해 항일 문화계몽단체의 설립에 참가하였다. 1906년 하반기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여 발표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1년 10월 초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진보적 신문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Далекая Окрайна)』의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1912년 4월까지 15회에 걸쳐 「조선으로부터의 편지(Письма из Кореи)」를 연재하며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을 비판하다가 7개월 만에 추방당하였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권업회(勸業會)’의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14년 거행될 예정이던 ‘한인의 노령 이주 50주년 기념행사’의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우수리스크주 국경위원회에서 통역으로 일하였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이후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아지미읍 농민대회에서 읍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5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두고 기관지로 『청구신보(靑邱新報)』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신문의 편집인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와 신한촌의 한민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12월 29일 실시된 블라디보스토크 시의회 의원선거에서 한용헌과 함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한인들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반일 시위를 일으켰다. 박은식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의 러시아어 번역본 교정을 맡았으며, 독립선언서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공사관에 배포하였다. 그해 겨울 이용·김좌두·김하석·김규면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 ‘독립단’을 조직했고, 신한촌의 한인민회를 재편한 한인지방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1920년 2월 장도정·전일 등의 일세당이 이름을 바꾼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재건하고 부회장이 되었다. 3월 1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러시아 혁명정부 당국자들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공사 그리고 각 신문사 대표를 초청하여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기념식 후 연회에서는 한인들을 대표하여 3·1운동의 의의와 한인의 혁명운동을 소개하고 러시아 정부의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1920년 4월 4일 일제가 ‘연해주 4월참변’을 일으키자 지하에서 한인 빨치산부대를 러시아 빨치산부대 및 지하조직과 연결시키고, 선전선동문을 작성하여 일본 군대에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혁명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부랴트혁명운동의 지도자인 사히야노바(М.М. Сахьянова)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나는 제국주의간섭군과 백군들이 점령한 엄혹한 환경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동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김만겸 동무를 잘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는 한인 민족해방운동의 뛰어난 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위임받은 모든 일들을 성실히 수행했으며 점차 나와 좋은 동지적 관계를 맺어나갔다.” 1920년 5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 원동전권위원 빌렌스키의 지령에 따라 보이틴스키와 함께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상하이에서 보이틴스키와 함께 코민테른 동아비서부를 결성하고 산하 고려부의 사업을 총괄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있던 이동휘 등의 한인사회당 성원들과 협력하여 한인공산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상하이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인 여운형·조동호·안병찬·최창식 등도 참여했다. 한인공산당은 잡지 『신생활』과 『공산』을 출판하고, 『공산당선언』을 번역하여 발간하였다. 또한 상하이의 한인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기도하여 노동회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대회에 한인공산당 대표로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상하이에 ‘고려공산당 상해지방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이 되었다. 1922년 3월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의 다나카 대장 암살미수사건과 관련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될 위험에 처했으나, 자신의 집 2층에서 뛰어내려 도피하였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했으나, 이르쿠츠크파 대의원들과 함께 집단으로 퇴장하였다. 이후 치타에서 별도의 당대회를 개최하고, 당대회에서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12월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이르쿠츠크파의 입장에서 한국의 공산주의운동을 정리한 문건인 “Краткий очерк о корейском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м движении (История образования Иркутской и Щанхайской групп, 「조선공산주의운동 약사(이르쿠츠크그룹과 상해그룹 형성의 역사)」)”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 직후 한국 문제를 토론하고자 조직된 조선문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조선문제위원회는 국내외에 소재하는 모든 한인 사회주의자들을 지휘하여 통일된 공산당을 결성하기 위해 코민테른 동방부 산하에 ‘고려총국(코르뷰로)’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3년 2월부터 1924년 2월까지 1년 동안 존속했던 고려총국의 회의에 연해주지방정부 한인문제전권위원의 자격으로 출석하여 한인의 단일혁명전선과 단일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러시아에서 내전이 종결된 후 1923년부터 연해주 지방정부에서 한인문제전권위원으로 활동하며 연해주 한인들의 입적 문제, 토지 문제와 여러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과 문화계몽에 힘써 1924년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고려사범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도시와 농촌의 한인 마을에 많은 초중등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연해주 일대 즉,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파스크, 이만, 하바롭스크, 수찬, 올가 그리고 포시예트 등지에 한인문제전권위원직을 설치하였다. 1929년부터는 당사업과 함께 극동국립대학 교수직을 겸임하였다.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사범대학을 설립하는 데 관계했으며, 사범대학 교수로 한인 학생들을 가르쳤다. 1932년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조선극장에도 관계하였다. 1935년 11월 22일 ‘외국 정보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다’라는 혐의로 내무인민위원회(НКВД)에 붙잡혔다. 1936년 7월 10일 내무인민위원회 산하 특별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사범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블라디보스토크 7년제 중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가족과 함께 카자흐스탄 악튜빈스크주로 옮겨갔다. 카자흐스탄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8년 5월 28일 다시 카자흐스탄 내무인민위원회에 붙잡혔다. ‘소련에 반대하는 첩보 파괴 활동에 대한’ 1938년 10월 7일자 알마타주 내무인민위원회 트로이카(Тройка)의 결정에 따라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선고는 다음 날인 10월 8일 집행되었다.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1958년 6월 9일 투르크스탄군관구 군사법정에 의해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Ким Мангем, Краткий очерк о корейском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м движении (История образования Иркутской и Щанхайской групп)(김만겸, 「조선공산주의운동 약사(이르쿠츠크그룹과 상해그룹 형성의 역사)」, РГАСПИ Ф.495 оп.63 д.63. ; Ким М.Т. Корейские интернационалисты в борьбе за власть Советов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1918~1922)(마뜨베이 김, 『극동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서 조선인 국제주의자들(1918~ 1922)』), Москва, 1979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번역). ; Ким Мангым(И.С.Серебряков)(김만겸), Москва: ИВ РАН, 2001. ; Инеса Ким, Кривые небеса(이네사 김, 『겹친 하늘』), Москва, 2004.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 윤상원, 「1920년대 초반 러시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과 코민테른-김만겸의 활동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16호, 역사학연구소, 2006. ; 윤상원, 「1910년대 초반 김만겸의 활동과 식민지인식」, 『역사연구』 제17호, 역사학연구소,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