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무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КИМ МЕН МУ
출신지
평북 강계(江界)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건국포장(2011)
주요 활동
1920년 대한의용군 소대장, 1921년 6월 고려혁명군 제3연대 제3대대 중대장으로 활동
관련 조직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생애
1897년 3월 1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곡하면(曲河面) 의진동(義眞洞)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어로 КИМ МЕН МУ라고 쓴다. 소학을 배운 정도의 학식이 있었고, 독립군에 들어가기 전에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만주에서 무관학교를 마치고 1919년 12월 30일 독립군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소속 학생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홍범도(洪範圖)와 지청천(池靑天)의 주도로 1920년 말 결성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에 참여하였다. 대한의용군 참여 당시 가장 우수한 대원으로 평가되어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부대 재편이 끝나자 러시아 국경을 향해 이동하여, 1921년 1월 연해주 이만Iman(현재 달레네첸스크Дальнереченск)에 도착하였다. 이만 도착 후 다른 한인 독립군부대와 함께 아무르주 스보보드니(自由市, Свободный)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벌어진 자유시참변 이후 스보보드니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조직되자 제3연대 3대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의 후보당원이었다. 1921년 7월 5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고려혁명군에 대하여 이르쿠츠크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자, 고려혁명군의 일원으로 자유시를 떠나 8월 말경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이르쿠츠크 도착 후 고려혁명군은 10월 28일 지청천을 책임자로 하여 군사훈련 및 정치교육을 담당할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때 박밀양(朴密陽)·최필립 등과 함께 사관학교 본부 부관으로 선임되었다. 지청천의 부관으로 활동하는 한편 사관학교의 교원으로 생도들을 가르쳤다. 당시 순직하고 부지런하며 간사가 없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신망이 두터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원동 내무인민위원부의 학교에서 한국어와 일본어 강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7년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에 거주하던 중 일본군 스파이라는 혐의로 9월 23일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13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 출장법정에서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형이 집행된 이후 하바롭스크에 묻혔다.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결정에 따라 범죄요건 부재로 1959년 11월 19일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편, 『독립운동사료-러시아편』 5, 1997. ; 임경석, 『한국사회주의의 기원』, 역사비평사, 2003.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0. ;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인명편1, 독립기념관, 2019. ; 전 뷔또르, 「1920년대 초 연해주에서의 고려인의 민족운동. ; 김승빈과 남만춘의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5,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