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파나시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이명 : 김성우(金聲宇)
출신지
러시아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애국장(2006)
주요 활동
1919년 3.1운동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 배포, 이후 러시아지역 사회주의운동과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 스탈린대탄압에 희생
관련 사건
3.1운동, 고려공산당창당대회(이르쿠츠크파), 스탈린대탄압
관련 조직
고려공산당, 러시아공산당
생애
1900년 러시아 연해주 포시에트구 수하놉까촌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김성우(金聲宇)이다. 1912년 지신허(Tizinkhe) 교구 소속 러시아소학교, 1914년 지신허촌의 2년제학교를 졸업한 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소왕령) 러시아중등학교(김나지움)을 졸업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학생운동과 조선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8년 6월 소비에트 당국의 허가를 받아 개최된 한인청년학생 전시베리아대회에서 조직된 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으나, 체코군의 반란과 백위파 정권의 등장으로 조직은 해산되고 말았다. 1919년 배일적 성격을 가진 기관지 『학생의 목소리』가 러시아어로 발간되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하는 기사들이 연재되자 경찰에 의해 폐간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전개된 3·1운동에 호응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오성묵(吳成黙)과 함께 각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되었다. 1920년 1월 말과 2월 초 연해주 일대가 러시아 ‘빨치산’에 의해서 탈환되자 ‘빨치산 본부’와 연락하여 일본어로 된 선전 전단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4월참변이 발생했을 당시 장도정(張道政)·김진(金震) 등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간부들과 함께 아무르주의 블라고베셴스크로 이동하였다. 이후 5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고 주당대표자회의에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어 아무르주 러시아공산당위원회의 한인부 비서와 공산당청년회 한인부 비서로 선임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의장단에 선임되었다.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들의 대표 자격을 비판하고,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Boris Shumiatsky)를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이르쿠츠크파로부터 대회에서 제명당하고 시베리아 옴스크로 추방되었다. 옴스크와 튜멘을 거쳐 모스크바로 도망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단과 만났다. 이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지시로 검사위원회가 작성한 「국제공산당 검사위원회 결정서」(1921.11.15)에 따라 고려공산당 연합간부가 구성되자, 중앙간부의 책임일꾼으로 임명되었다. 고려공산당 연합간부의 구성원인 이동휘(李東輝)와 홍도(洪濤) 2인, 그리고 박진순(朴鎭淳)과 함께 레닌을 면담할 때 비서 겸 통역으로 활약하였다. 고려공산당 연합간부에 의해서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의 준비요원으로 임명되어 대회를 준비하였다. 임시의장단의 서기로 활약했고, 새로이 구성된 10명의 통합고려공산당 중앙간부, 제4차 국제공산당 대회 참가할 대표로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와 중립파의 반대 공작으로 국제공산당이 각파의 대표가 모스크바로 소환되었을 때 상해파 대표로 이동휘·윤자영(尹滋瑛)과 함께 출두하여 대회의 적법성을 옹호하였다. 대회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한 국제공산당에 의해서 국제공산당 꼬르뷰로(고려중앙국, 고려총국)가 조직된 이후 조선혁명과 관련된 업무를 중단하였다. 이후 연해주(변강)의 당기관에서 활약했다. 변강현당위원회 고려부(1923년초~1924), 연해주 현공청위 고려부장(1924~1925.7),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현당위원회 선전부장, 관구당위원회 선전부장(1925.8~1927.8), 제2구역 당위원회 선전부장(1927.9~1928.2), 하바롭스크 관구당위원회 선전부장(1929.2~1930.1) 변강당위원회 대중선전부장(1930.2~1931.1), 『티호오케안스카야 즈베즈다(태평양의 별)』 임시주필(1931.2~1931.4) 등을 역임하였다. 1931년 5월 변강당간부의 주선으로 붉은 학사에 입학하여 2년 후인 1933년 5월에 졸업하였다. 이후 당중앙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포시에트구역 엠떼스(기계트랙터보급소)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3월부터 포시에트구역의 당위원회 제1서기로 근무하였다. 1934년 1월에 개최된 원동변강당대표자회의에서 제17차 당대회에 참가할 대표로 선출되었다. 오랜 동지인 김미하일과 함께 참가하였다. 국내에서 수차례에 걸쳐 101인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검거가 일어나자 1927년 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선노력군중대회’를 개최하여 이를 규탄하고 구제 후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동휘 역시 모플(국제혁명자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행했다. 변강당간부 소수민족부장과 선전선동부장으로서 이동휘가 원동변강 모플위원회의 고려부 책임자로 임명될 수 있게 했다. 이동휘가 1935년 1월 31일 사망했을 때 포시에트 엠떼스(MTS) 정치부장으로서 장도정(張道政)·이문헌 등과 함께 이동휘의 장례식을 주도하였다. 이것이 스탈린대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포시에트구역 당제1비서로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으나, 1936년 1월 원동변강당간부에 의해서 하바롭스크로 호출되어 출당통보를 받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추방되었고, 체포되어 다시 하바롭스크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1936년 4월 7일자로 스탈린 등 소련당지도자들에게 항의 전보를 보낸 결과 재심지시가 내려와 우파(Ufa)시로 3년 정배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1937년 9월 20일 원동변강 내무위원부의 결정으로 다시 체포되어 하바롭스크로 이송되어 1938년 5월 25일 사형 판결을 받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혐의는 “1929년에 일본 첩보기관에 채용되어 일본의 밀정으로 반혁명활동”을 해왔고, 1934년에는 반소 한인 폭동을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1957년 11월 19일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김 블라지미르(조영환 역, 박환 해제), 『재소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국학자료원, 1997.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창작과 비평사, 1996.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 반병률, 「在露韓人 강제이주 이전의 한인사회의 동향(1923-1937)」,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반병률, 「러시아혁명 전후 시기 계봉우의 항일민족운동, 1919-1922 : 기독교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러시아의 한국학과 북우 계봉우』, 소명출판, 2013. ; 이인섭 저(반병률 엮음), 『망명자의 수기』, 한울아카데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