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진 姜相震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이명(별칭)
강응오(姜應五), 강시우(姜是愚)
출신지
함남 이원(利原)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애족장(1995)
주요 활동
1919년 3월 함경남도 이원군 만세시위 참여, 망명 후 대한독립군비단 참가 및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 이만에서 대한의용군 참여, 1921년 이만전투 이후 대한의용군을 이끌고 하바롭스크를 거쳐 인역까지 퇴각, 원동해방전쟁의 전환점이 된 볼로차예프카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여하여 승리에 공헌, 원동해방전쟁 종결 이후 북만주에서 사회주의운동, 블라디보스토크 제8호 학교 교사
관련 사건
3.1운동, 이만전투, 원동해방전쟁
관련 조직
대한독립군비단, 고려의용군사의회, 대한의용군
생애
1897년 10월 11일 함경남도(咸鏡南道) 이원군(利原郡) 수항리(壽巷里)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강응오(姜應五), 강시우(姜是愚)를 사용했다.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협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지었다. 1919년 3·1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만주 창바이현(長白縣)으로 망명하여 유일우(劉一優)가 단장을 맡고 있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참여하였다. 조선독립단은 1919년 11월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으로 재조직되었다. 군비단의 주도 인물들은 이전 시기부터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서 활동하던 이들과 3·1운동에 참가한 인물들이었다. 군비단은 중앙에 총무부·이사부·군사부·경호부·문화부·서무부·교통부·외무부를 두고 함경도 각 지방과 간도 일대에 지단을 두었다. 1921년 1월 15일 제2차 대회에서 군사본부를 연해주 이만(Iman, 현재 달레네첸스크)으로 이동하기로 한 군비단의 결정에 따라 그해 3월 36명의 제2차 파송부대를 이끌고 창바이현에서 출발하였다. 일본군과 중국 마적단을 피해가며 미산(密山), 후린(虎林)을 거쳐 6월 연해주 이만에 당도하였다. 무기 구입을 위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간 군비단 군사부장 김찬(金燦)과 군사부원 박춘근(朴春根), 그리고 소년모험단의 홍파(洪波) 등과의 협의에 따라 결행된 군비단 군사부의 연해주 이동은 총 9회에 걸쳐 약 500명이 이동하였다. 군비단 군사부는 원래 이만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자유시의 상황이 불안정하여 옮겨가지 않고 이만에 정착한 후 1921년 7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로 재편되었다. 이후 자유시참변 당시 무장해제를 피해 옮겨온 이용(李鏞)·한운용(韓雲用) 등 군사지도자들을 받아들인 고려의용군사의회(高麗義勇軍事議會)는 이용을 사령관으로 3개 중대 1개 대대로 편성된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으며, 사관 양성을 위해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1중대장에는 임표(林彪), 2중대장에는 한운용, 3중대장에는 김홍일(金弘壹)이 선임되었다. 이때 사관학교의 학생이 되었고, 동시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의 헌병소대장이 되었다. 1921년 12월 4일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이 이만으로 진격해 오자 대한의용군 1중대와 3중대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함께 퇴각하였다. 본대에 뒤떨어져 이만역을 방어하던 한운용의 제2중대는 백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마춘걸을 제외한 49명 전원이 순국하였다. 백군의 전사자는 600명 이상이었다. 이만 퇴각 당시 척후대를 이끌고 개별적 교전을 하며 하바롭스크(Khabarovsk)를 거쳐 인역에 도착하였다. 12월 말 인역전투에서 백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인역에서 대한의용군은 극동공화국 제6연대에 편입되었다. 1922년 1월 말 반격을 시작하여 2월 10일 원동해방전쟁의 분기점이 된 볼로차예프카(Волочаевка) 전투에서 6연대 1중대 소대장으로서 최초로 철조망 장애물 지대에 접근하여 병사들을 인솔해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하바롭스크를 탈환하는 데 참여하였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6연대에 편입되었던 대한의용군은 볼로차예프카 승리의 공훈으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하바롭스크 탈환 이후 재편성된 고려특립연대에 소속되어 하바롭스크 방어를 담당하였다. 1922년 10월 원동해방전쟁이 종결된 이후 1923년 초까지 백군의 잔당을 소탕하는 후린·미산 전투에 참여하였다. 제대 이후 김경협 등과 함께 북만주로 가서 중국공산당에 가담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까지 연해주 바스크소야기노촌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8호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부터 1937년까지 하바롭스크 국영출판부 중국부에서 제자 직공으로 일하였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군으로 복무하였다. 이후 소련 툴라시의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였다. 1957년 소련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개인연금을 받았다. 1958년 카프카즈에서 수기인 『군비단에서』 초고를 작성하였으며, 1967년 카자흐스탄 잠불에서 원고를 완성하여 이인섭(李仁燮)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한국에서 『군비단 관계 수기』로 출판되었다. 1973년 3월 1일 서거하였으며, 묘소는 모스크바주 노보-프랴진스코예(Ново-Фрязинское)공동묘지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홍범도 편)』, 1995. ; 국가보훈처 편, 『독립군의 수기』, 1995.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최 발렌틴 발렌티노비치,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한인의 항일 독립운동』, 재러독립유공자후손협회·국사편찬위원회·주러시아연방대한민국대사관, 2004. ; 김주용, 「중국 장백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활동과 성격 - 대한독립군비단과 광정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92집, 한국사학회, 2008.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1918~1922)』,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