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양오 姜良五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출신지
함남 이원(利原)
운동계열
노령방면
포상훈격
애국장(2015)
주요 활동
1911년 권업회(勸業會) 회원, 1912년 순치동제당(脣齒同濟黨) 당원, 1913년 권업회 재무 겸 의원 선출, 1917년 한인신보사 회계검사원으로 활동, 신한촌 민회(民會) 평의원, 한민회 총회 노동부원으로 선출되어 활동, 1918년 전로한족회 중앙위원 선출, 1919년 한인민회 회장 선출,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지부장으로 임명, 공아단(共啞團) 결성, 1921년 한민학교학회 설립,
관련 조직
권업회, 전로한족회
생애
1875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서면(西面) 송로대리(松老臺里) 출생하였다. 이명은 강양오(姜揚吾)·강양오(姜良吾)·강양오(姜揚五)·강양오(姜楊五)·강석오(姜錫五)이다.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서 연해주 한인 사회의 민족운동가들이 장기적인 독립 방략을 위해 한인 사회의 자치 결사로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항일운동을 위한 결사체로 1912년 결성된 순치동제당(脣齒同濟黨)의 당원이 되었다. 1913년 6월 30일 열린 권업회 하반기 정기총회에서 재무 겸 의원으로 선출되어 연해주 한인 사회의 이익 증진과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8월 29일 강제 병합일을 맞아 이동휘·이동녕·김립 등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국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노령)의 대표적 한인 단체였던 권업회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 강제해산되었다. 전쟁 기간에 침체하였던 노령의 독립운동은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노령 한인들은 1917년 5월 니콜스크에서 전로한족대회를 열고 전로한족회의 중앙기관으로 러시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설립하였다. 반면, 노령 한인들의 대단결과 전면적 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한인들은 전로한족회를 탈퇴하고 그해 7월 8일 신한촌 한인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한인신보(韓人申報)』를 창간하였다. 이때 한인신보사의 회계검사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9월 9일과 10일 양일간 신한촌에서 열린 민회(民會)에서 평의원에, 그리고 12월 17일 열린 한민회 총회에서 노동부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8년 6월 열린 전로한족회 헌장회의에서 중앙총회의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19년 1월 14일 열린 신한촌 민회에 의사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2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고, 19일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할 때 한인의 이름으로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포고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2월 7일 청년동지회를 개최하고 총기 구입을 결의하였다. 2월 25일 개최된 제2차 전로한족회대회에서 전로한족회를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면서 재정위원에 선출되었다. 11월 20일경에는 상하이(上海)에서 6월 폭탄 제조와 의열 투쟁을 목적으로 결성된 구국모험단의 지부를 자신의 집에 설치하고 지부장이 되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청년들에게 폭탄 제조 및 사용법을 교육하였다. 12월에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폐쇄된 신한촌 민회를 한인민회로 복구하여 회장에 선출되었다. 1920년 1월 니콜리스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상사회사(商事會社)를 가장하여 지부를 설치하고 사무 집행과 무기 구입 중개 등을 담당하였고, 2월에는 친일 인사 2명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1918년 ‘국제간섭군’으로 침략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연해주 혁명 정권을 무너뜨리고 동시에 반일적 한인을 탄압하려고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한인촌을 습격하였다. 일본군이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고 수백 명의 한인을 학살하는 ‘4월 참변’을 일으키자, 파르티잔스크로 피신하였다. 파르티잔스크에서 신민단 단장 김규면(金圭冕) 등과 함께 러시아 적군과 교류하며 이를 방해하는 마적을 막기 위해 각지에 10인 내지 15인으로 구성된 자위단과 같은 사포(私炮)를 조직하였고, 6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20년경 김영학(金永學), 조장원(趙璋元), 조영진(趙永晋) 등과 비밀결사인 공아단(共啞團)을 결성하였다. 1921년 1월 열린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 총회에서 윤능효(尹能孝)와 함께 신한촌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에는 조영진·한용헌(韓容憲)·김치보(金致甫) 등 신한촌 한민학교(韓民學校) 학부모 45명과 함께 한민학교학회를 설립하였다. 11월 21일 신한촌에서 김영학·임호(林虎) 등과 함께 시베리아에 설립된 80여 민족 학교의 불완전한 교과서, 교원 불충분, 학제 불통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전로재주조선인교육회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1월 10일에서 17일까지 1주일간 각지의 교육연구회 대표 50여 명이 신한촌에 모여 대회를 열고 전로재주조선인교육회를 시베리아조선인교육회로 개칭하였다. 이때 재무부장에 선출되어 교육 확장과 일반 민중에 대한 문화 보급에 노력하였다. 1922년 10월 시베리아에 진주하던 일본군이 모두 철수하면서 극동 러시아 지방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1923년 1월 10일 신한촌 백산학교(白山學校)에서 혁명적 한인 청년회의를 소집하고 국내 공산주의 선전과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적기단(赤旗團)을 설립하였고, 이후 단원들은 대거 북간도 영고탑(寧古塔)으로 이동하였다. 그해 8월 하순 영고탑에서 열린 적기단 제3회 총회에서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 1월 ‘소련에 위해(危害)한 활동’을 행한 혐의로 체포되어 그해 5월 14일 최고형인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시행 여부는 확인할 수 없고, 1989년 11월 28일 러시아 태평양함대 검사부에 의해 복권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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