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제 金光濟

계몽운동 애족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경주(慶州)
이명(별칭)
자 : 덕재(德在), 호 : 동양자(東洋子)·동양생(東洋生), 초명: 김홍제(金弘濟, 金洪濟), 시호 : 석람(石藍)
출신지
충남 남포(藍浦)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훈격
애족장(1990)

주요 활동

명성황후영세감모비 건립, 신라왕릉 정비사업 추진, 『만국공법요략』 발간, 『연설대해』 저술, 『동국풍아(東國風雅)』·『양대기서(兩大奇書)』 편집·발행

관련 사건

을미홍주의병, 녹지사건, 을사늑약 부당 상소, 국채보상운동, 제2의 3·1운동, 노동운동

생애

1866년 7월 1일 충청남도 남포군(藍浦郡, 현 보령시) 웅천면(熊川面) 평리(坪里)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상하(金商夏), 모친은 풍천 임씨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아명은 김홍제(金弘濟, 金洪濟) 등이다. 호는 동양자(東洋子)·동양생(東洋生), 시호는 석람(石藍), 자는 덕재(德在)이다. 17대조인 우제공(愚濟公) 한(漢)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반발하여 남포로 낙향·은거한 이래 후손들은 대대로 이곳에 살아왔다. 고향 사숙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윤석봉(尹錫鳳)과 황재현(黃載賢) 등에게서 전통 학문을 수학하여 척사 정신과 의리 정신을 배웠다. 20세가 되는 1885년 창원 황두수(黃斗秀)의 딸과 혼인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관계에 진출한 이래 1888년 4월 병조 효력부위 용양위 부사용(兵曹 效力副尉 龍驤衛 副司勇), 동년 6월 선략장군 행(宣略將軍 行) 용양위 부사과, 통훈대부 행 훈련원 첨정(通訓大夫 行 訓練院 僉正)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9월 이후 정3품 통정대부 비서원승(秘書院丞)·삼남찰리사(三南視察理使)·동래경무관(東萊警務官) 등 관직을 지냈다. 이후 1902년 12월 정3품으로 승차되었을 뿐이다. 본격적인 사회 활동은 동학농민운동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고향에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는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활동하였는데. 일부 기록에는 동학농민군에 가담·활동한 것처럼 서술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직후 이세현(李世永)·이관(李寬)·황재현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단발령과 을미사변에 분개한 을미홍주의병이 실패한 후 이들은 재기를 도모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전후로 일어난 의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사하였다. 패배하여 흩어진 남은 군사가 배에 가득 차지 않으니 한강나루 오늘에사 내 마음이 슬프도다. 동쪽으로 오는 소식 어찌 그리 흉악한고 서쪽으로 건너간 남아는 다시 가련하도다. 한칼로 맹세함에 백일을 다투고 백 년에 한을 두어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네. 1896년 10월에는 윤이병(尹履炳)·이세진 등과 녹지고변사건(綠地告變事件)을 도모하다가 장(杖) 100도에 2년간 유배형을 선고받아 전남 지도군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특별사면으로 동지들과 함께 이듬해 2월 유배형에서 풀려났다. 1902년 11월 전참봉 정훈모(鄭薰謨), 전사과 심상희(沈相禧), 전위원 윤용(尹墉), 전교원 이헌(李憲), 전주사 한승복(韓承履)·정인관(鄭寅寛), 유학 조기환(曹淇煥) 등과 명성황후영세감모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전국 유생들에게 통문을 돌리는 등 명성황후 명예 회복에 앞장섰다. 신라 역대 왕중 경주 김씨 28왕 왕릉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와 보존 방안도 모색하는 등 왕실 권위를 회복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장단군에 소재한 경순왕릉이 주민들의 무지함과 무분별한 개간으로 퇴락한 사실에 분노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1904년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심각하게 인식하여 각 항구 조계지를 벗어난 전답이나 가옥을 외국인에게 절대 매매하지 못하도록 엄금할 것을 외부대신에게 건의하는 장서를 올렸다. 또한,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과 청나라 동순태상회 진출에 따른 객주·여각 등 상인층 보호를 위하여 전 판사 윤이병, 전 군수 이규항(李圭恒), 전 의관 송수만(宋秀晩)·심상희, 유학 이상철(李相喆), 전 의관 정응설(鄭應卨)·정형기(鄭衡基)·김연식(金璉植), 전 참봉 고석주(高石柱) 등과 공제소(共濟所)를 조직하였다. 공제소 임원진은 소장 윤이병, 부장 이규항, 총무 송수만 등으로 심상희·이상철 등과 부총무를 맡았다. 이러한 활동은 송수만 등과 함께 이듬해까지 지속해서 상권 수호와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데 매진하였다. 일제는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한편, 이들과 중재를 요청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간신배 처단과 부당성을 성토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1906년 1월 대구로 가서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사장에 취임한 이래 2월에는 대구광문회가 설립한 사립보통학교 교장과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강사로서 활약하였다. 대구·경북 지역 지식인·자산가·관료 등의 지원을 받은 대구광문사는 실학자 저술 발간과 신학문을 도입하여 자강 의식을 일깨우는 데 노력하였다. 또한, 도내 각 학교에 사용될 교과서와 『월남망국사』 등 각국 망국사도 편찬·보급할 계획을 세웠으며, 근대 교육 중 도덕 교육이 부실함을 알고 사서삼경을 기초하여 도덕 교육 교육 강화를 위한 교과서 편찬·보급을 모색하였다. 대구광문회 부회장에 취임하여 경북 도내 사립학교 설립 운동을 주도하는 근대 교육 운동을 펼쳤다. 대구관찰사 신태휴(申泰休)는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광무황제는 특별하사금 1,000원과 함께 「교육칙유」를 내렸다. 지방자치제 실시를 목표로 조직된 계몽 단체인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소장도 맡았다. 지방자치를 위한 선행 조건으로 근대 교육 시행에 의한 민지(民智) 계발(啓發)을 먼저 인식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大東光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에서 부사장 서상돈의 발의로 시작되었다. 회원들은 이러한 제안을 만장일치로 찬성하였다. 발기 연설을 마친 후 당장 실시할 것을 주창하고 자신의 담뱃갑과 담배를 버리고 3개월에 해당하는 담뱃값 60전과 특별의연금 10원을 내었다. 회원들은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를 작성하여 각 신문사로 발송하였다. 요지는 대한민국 2천만 명이 담배를 끊어 담뱃값 20전씩을 3개월간 저축하면 1,300만 환이 되므로 전 국민이 3개월간 단연하여 차관을 갚아 일본의 경제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내용이었다. 동지들과 함께 대구에 국채지원금수습사무소(國債志願金收拾事務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2월 21일에는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국채보상 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도 개최되었다. 노파·걸인·백정·기생 등 주민들이 운집할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에 「단연보국채(斷烟報國債)」라는 논설을 싣고 동참을 호소하고 나섰다. 대한매일신보사는 사고(社告)를 통하여 단연동맹을 선언한 후 2월 28일 자에 순한글 기고문 「국채보상에 대하여 경고 아 동포」를 실어 2천만 동포의 참여를 주창하였다. 1907년 3월 1일 대한자강회 임시평의회에 국채보상에 관한 의안을 제출하였다. 본회는 『대한자강회월보』 9호 논설란에 「단연상채문제(斷煙償債問題)」와 잡록란에 국채보상운동 발기 경위와 전국 각지에 조직된 국채보상단체 취지서 7건을 게재하여 회원과 지회원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 1907년 4월에는 지도·총괄할 통합 기구로서 소장 한규설(韓奎卨), 후임 윤웅열(尹雄烈)의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도 조직되었다. 보상금에 관한 전반적인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장박(張博)의 국채보상조사회와 이를 검사하기 위한 민종식(閔宗植)의 국채보상검사소도 설립되는 등 통합과 장기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다. 1906년부터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가입·활동하였다. 이어 대한협회에도 가입하여 호남 지역 시찰원으로서 임실·부안·김제·광주·목포 등지를 순회하면서 대중 강연을 통한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교남교육회 규칙기초위원·평의원으로서 이 단체 기초를 수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형우(南亨祐)·이근영(李根泳) 등 5인과 함께 도서부 편술원과 교육부 학무원으로 피선되었다. 1908년 4월 15일에는 교남교육회 임시총회에서 「교육과 회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동시에 기관지·잡지·계몽도서 편찬·발행과 민중 계몽을 위한 강연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기호흥학회에서는 기고문을 투고하는 등 폭넓은 활동과 교류를 병행하였다. 강연 활동과 내용은 1909년 9월 광동서관에서 『강연집(동양 선생 김광제 강연)』으로 출판되면서 연설가로서 명성이 각인되었다. 또한, 제국신문찬성회 발기인, 출판사 한양일보사(漢陽日報社) 운영, 김가진(金嘉鎭)과 서적구람회사 설립, 이장훈(李章薰)과 서적종람소 설립 등의 활동도 벌였다. 「가정과 신문」, 「여학교 설립의 문제」·「자슨부인회 연설」·「여자교육의 취지」·「부인도 권리를 회복할지어다」 등이란 제목으로 언론과 여성교육을 강조하였다. 노동야학회 총무로서 노동자 권익을 위한 활동도 병행하였다. 1909년 6월에는 자본금 3,000원으로 『한양일보』 간행을 준비하였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탄한 후 마산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마산항은 식민 통치가 강화되면서 왜색풍 문학서적도 더욱 많이 출판되었다. 이에 마산서적종람관을 중심으로 출판 문예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마산서적종람관 부설 조직으로 마산문예구락부를 설치하고 활동하였다. 마산 지역 최초의 근대문학잡지인 『마산문예구락부』 창간호는 마산문예구락회에서 1913년 12월에 발간하였는데, 문예지는 본문 94쪽 분량이다. 1917년에는 신라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대표적인 고시를 엄선한 『동국풍아』를 삼청당에서 편집·간행하였다. 이는 『마산문예구락부』에 이어 출판한 시선집으로 6권 2책이다. 조창규(趙昶奎)가 교열을 담당하였으며, 권두에 노상직(盧相稷) 서와 그의 발문이 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와중에도 역시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와 『제갈량심서(諸葛亮心書)』를 묶은 『양대기서(兩大奇書)』를 삼청당에서 편집·간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노동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1920년 2월 16일 서울 종로청년회관에서 조선노동대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25일에는 「노동단 취지서」를 발표하는 가운데 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주요 발기인은 문탁(文鐸)·노병희(盧秉熙)·김영만(金榮萬)·권직상(權直相) 등이었다. 목적은 노동자의 생활·교육·질서 등 3요항을 지도·향상시키는 상부상조와 교양 함양에 있었다. 사무소는 종로구 재동이었다. 4월 17일부터 경성노동대회는 서울 시내와 연강 방면으로 회원을 파견하여 「노동대회 취지서」 수만 장을 배포하는 선전 활동을 펼쳤다. 전단이 부족할 정도로 시민의 호응이 대단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5월 2일 황금정 광무대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는 수천 명이 운집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창립총회에서 총재 권직상, 부회장 정규환(鄭圭換), 총무 유석태(柳錫泰), 간사 김영만, 고문 현영운(玄英運) 등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회장을 맡았다. 회원은 불과 3개월 만에 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노동대회는 노동공제회보다 온건한 운동 노선 때문에 노동자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청년과 노동」, 「아회(我會)의 본령과 장래」 등을 주제로 강연회를 자주 개최하였다. 조선노동대회 조직을 준비하기 전에 이달(李達) 등과 제2의 3·1운동을 도모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무죄로 석방되었다. 4월 2일 『동아일보』 창간에 즈음하여 축사를 보냈다. 5월 20일 조선은행 앞 지게꾼의 영업 보호를 보장토록 일제 경찰과 교섭을 성사시키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경찰은 지게꾼들이 불법적으로 모여 사회적인 불안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영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임원진과 함께 지게꾼을 만나 휴식 시간이나 일감이 없을 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라고 일깨웠다. 6월 25일에는 노동대회 충북지회 발회식에 참석하여 「노동에 대한 연설」을 발표하였다. 이튿날 청주청년회 주최로 청남학교(淸南學校)에서 「부달목적지지즉부지(不達目的之地則不止)」라는 문제로 특별강연하였다. 운집한 청중 700여 명은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울렸다. 귀로 중에는 조치원청년회관에서 「청년과 노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27일 노동야학교에서 거행된 노동대회 연기군지회 설립발회식에 참석한 후 상경하였다. 다음 날은 상동교회에 연사로 초빙되는 등 거의 매일 연사로 활약하였다. 조선노동대회 출범 이후 각지에 조직된 지회에 참석하여 이들을 격려하는 연설은 일상사였다. 6월에는 고학생 모임인 갈돕회 고문도 맡았다. 출범에 즈음하여 축전과 아울러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종로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이화여전전도대 구령회에도 참가하여 기부금을 내놓았다. 6월 28일에는 상동교회 청년기독교전도단이 주최한 강연회 연사로 초빙되어 「조선의 노동」이란 주제로 연설하였다. 7월 13일에는 노동대회 원산지부 결당식에 참석하고 취지서와 축하 연설을 하였다. 마산으로 내려와 1920년 7월 24일 초대받아 저녁 식사를 하고 귀가한 후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55세를 일기로 경남 마산 석정에서 서거하였다. 사후 동년 8월 20일 마산청년단주동맹회는 남사정(南射亭)에서 ‘고김광제추도회’를 거행하였다. 이듬해 동지 이해춘(李海春)·노병국(盧秉局)·선철관(宣澈觀) 등은 아호를 동양자라 추존하고 묘비 “지사 동양자 김광제지묘”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1922년 4월 29일 노동대회는 각황사(覺皇寺)에서 고김광제추도회와 임종연·김재렬·신일용 등을 연사로 하여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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