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 黃玹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장수(長水)
이명(별칭)
자 : 운경(雲卿), 호 : 매천(梅泉)
출신지
전남 광양(光陽)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훈격
독립장(1962)
주요 활동
1910년 경술국치 반대
관련 사건
경술국치
생애
1855년 (음)12월 11일 전라남도 광양현(光陽縣) 미내면(彌內面) 석현리(石峴里, 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에서 아버지 황시묵(黃時默)과 풍천노씨(豊川盧氏)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는 운경(雲卿)이고, 매천(梅泉)이라 자호하였다. 1861년부터 서당에서 교육받았고, 1865년 전남 구례군(求禮郡) 광의면(光義面) 지천리(芝川里) 천변마을에 살던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에게 율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68년 향시(鄕試)에 응시하였고, 1871년 순천영(順天營) 백일장에 응시하였다. 같은 해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상사리(上沙里)의 해주 오씨(海州吳氏)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방문하여 가르침을 구하기도 하였다. 1876년 광양의 석현정사를 방문한 경남 하동의 성혜영(成蕙永)으로부터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소개받고, 1878년 여름 상경하여 만났다. 두 달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강위의 소개로 신헌(申櫶)·신정희(申正熙) 부자와 교류하였다. 1880년 큰아들 황암현(黃巖顯)을 낳고 다시 상경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을 만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건창이 귀양을 가기 전 근신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30일 동안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개성(開城)에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교류하였다. 이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세상사와 학문·문장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이후 김택영·이건창과 함께 ‘한말 3재(韓末 三才)’라 불리웠고, 조선후기의 학자 박문호(朴文鎬)는 이들의 교유를 ‘신교(神交)’라고 평하였다. 1883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별시(別試)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초장(初試初場)에 1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시골 출신임을 안 시관(視官) 한장석(韓章錫)이 둘째로 내려놓자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고 귀향하였다. 1884년 여수와 남해(南海)의 노량(露梁) 앞바다를 돌아보며 「이충무공귀선가(李忠武公龜船歌)」를 지었다. 1886년 (음)12월 8일 동생 황원(黃瑗) 일가를 포함한 가족들을 이끌고 광양 서석촌에서 스승 왕석보가 살았던 구례군 간전면(艮田面) 만수동(萬壽洞, 현 간전면 수평리 상만)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초옥(草屋) 몇 칸을 짓고 식수로 사용할 샘을 파는 한편, 1890년 구안실(苟安室), 1895년 구안실 옆에 1칸 정자인 일립정(一笠亭)을 지었다. ‘구안’은 『논어』 「학이(學而)」 편에 “군자는 먹을 때 배부르길 바라지 않고, 거처할 때 편안하길 바라지 않는다”에서 취한 것이다. 이곳에서 3,000여 권의 책에 묻혀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하는 한편, 손수 농사를 지으며 17년 동안 살았다. 그동안 1,700여 수의 시를 지었는데 고금에 절의를 지킨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주로 시제(詩題)로 삼았고, 집중적으로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1887년 이건창이 미국특파 전권대신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추천하였으나, 수행원이란 벼슬에 익숙하지 못하다며 거절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 생원시(生員試)에 응시하여 1등으로 합격하였고, ‘유학(幼學) 황현(黃玹) 생원(生員) 1등 제2인 입격자(入格者), 광서(光緖) 14년 3월’이라고 적힌 교지(敎旨)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하였으므로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귀향하였다. 1894년 봄 만수동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동비(東匪)·비도(匪徒)·토비(土匪)·비적(匪賊)·융(戎)’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여 책임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후세에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여, 만수동의 구안실에서 이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정리하였다. 그리하여 ‘책상에서 들은 대로 기록한다’는 뜻으로 『오하기문(梧下紀聞)』이라 명명하였다. 한편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저술하였다. 내용은 1904년 이후 7년 동안의 기록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1905년 을사년의 기록 분량이 가장 많았다. 또한 말단 관리의 비행부터 최고 권력자의 비리까지 낱낱이 기록하였고, 외세의 침탈과 일제의 침략상을 신랄하게 고발하였다. 특히 ‘의보(義報)’ 난을 만들어 1908년 (음)1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의병들의 활약상을 날짜와 지역 중심으로 간단한 메모 형식으로 기록하였으며, 의병을 모두 충의(忠義)에 뜻을 품은 자들이라고 존경하였다. 사망 직전 자손들에게 이 책의 원본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하였고,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책의 존재를 비밀에 붙였다. 1899년에는 「언사소(言事疏)」를 작성하며 그 이유를 갑오년 이후 개화의 근본이 아닌 말단만을 추구하여 나라가 위중한 상태에 빠졌음이 걱정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개화의 근본을 실천하는 방안으로 9개조의 시무책을 제시하였으나, 국왕에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1902년 (음)11월 29일 친구 이기(李沂) 등의 권유로 만수동에서 30리 거리인 구례군 방광면(放光面) 월곡(月谷, 현 광의면 수월리 월곡)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새로 만든 서재에는 성인당(成仁堂)과 대월헌(待月軒)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905년 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비분강개하였고, 당시의 심정을 담은 「문변(聞變)」 3수와 「오애시(五哀詩)」를 남겼다. 「문변(聞變)」에는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하였는데, “한강 물 흐느끼고 북악산이 찡그리는데 / 세도가 고관들은 티끌 속에 의구하네 / 청컨대 역대의 간신전을 훓어보소 / 나라 팔아먹지 나라 위해 죽은 간신 없다네”라고 하였다. 「오애시(五哀詩)」는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閔泳煥)·이건창·조병세(趙秉世)·홍만식(洪萬植), 그리고 평소 존경하던 최익현(崔益鉉)을 애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외에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자결한 이들에 대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사망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1908년 호양학교(壺陽學校)를 발기·설립하여 신학문 교육에도 주력하였다. 학교는 거주지인 구례 월곡에서 남쪽으로 2km 아래에 있는 지천리(芝川里) 지하 마을에 세워졌다. 10여 년간 존속되다가 1920년 광의공립보통학교(光義公立普通學校)로 전환되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을 정리한 후 (음)8월 6일 「자식에게 남기는 글(遺子弟書)」과 「생을 마감하는 시(絶命詩)」를 남긴 후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고 자결하였다. 자식에게 남기는 글에서 “내가 가히 죽어 의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선비를 키운 지 오백 년이나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아니하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천성을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었던 책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길이 잠들려 하니 죽어서도 통쾌하지 않은가.”라면서 자제들에게 죽어야 할 명분을 밝혔다. 절명시 4수에서는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의 나이 되었구나 / 몇 번이고 죽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네 / 오늘 참으로 어쩌지 못할 상황 되니 / 바람 앞 촛불만 밝게 하늘을 비추네 // 요기가 자욱하여 황제의 별 옮겨가니 / 침침한 궁궐에는 낮이 더디 흐르네 / 조칙은 앞으로 더 이상 없으리니 / 종이 한 장 채우는 데 천 줄기 눈물이라 //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 /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 //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 /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라네 / 결국 겨우 윤곡이나 따르고 마는 것을 / 부끄럽네. 왜 그때 진동처럼 못했던고”라고 하였다. 한편, 사망 1년 전인 1909년 서울 소공동 대한문 앞에 있던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이 운영하는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같은 사진이 두 장 남아 있는데 한 장에는 종이로 제작된 사진틀의 오른쪽에 친필로 ‘매천 55세 소영(梅泉五十五歲小影)’이라 쓰여 있다. 다른 한 장에는 오른쪽에 ‘매천거사 55세 소영(梅泉居士五十五歲小影)’, 왼쪽에는 “세속의 시류를 따르지 않으려 하니, 비분강개에 쌓인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네”로 시작하는 자작시가 두 줄로 적혀 있다. 1911년 5월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은 이 사진을 참조해 초상화를 그렸다. 채용신이 그린 초상과 사진은 현재 매천사(梅泉祠)에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었다. 1910년 10월 11일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사조(詞藻)」란에 ‘매천선생절필(梅泉先生絶筆) 4장 전 진사(進士) 황현(黃玹)’이란 제목 아래 절명 소식과 「절명시」 4수가 실렸다.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였는데, 그중 156명의 애사(哀辭)와 39명의 제문(祭文)이 현존한다. 1911년 8월 제자들이 유언에 따라 유고를 정리하여 『매천집』을 간행하고자 전국의 여러 선비들에게 「통문(通文)」을 발송하였다. 그해 말 중국 화이난(淮南)의 한묵림인서국(翰墨林印書局)에서 7권 3책의 『매천집(梅泉集)』이 간행되었다. 500질이 간행되어 50질은 중국에 반포하고, 450질은 국내로 보냈는데 다수가 일제로부터 압수당하였다. 1913년 김택영이 중국 화이난에서 『매천집』 간행 때 빠졌던 작품들을 모아, 『매천속집(梅泉續集)』 2권 1책을 간행하였다. 1932년에는 『매천집』과 『매천속집』에 실린 작품에 누락된 시문을 추가하여 이른바 『총독부 검열본 매천집』을 출판하려다가 무산되었다. 1955년 탄생 100주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매천야록』을 간행하였다. 1978년 아세아문화사에서 『황현전집(상·하)』를 간행하였다. 1988년 전주대학교 호남학연구소에서 『매천전집(梅泉全集)』 5책을 간행하였다. 2010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매천집』 4책을 한글역으로 간행하였다. 1962년 후손과 제자, 지역 유림들이 거주지에 위패를 모신 매천사(梅泉祠)를 건립하였다. 1999년 8월의 문화인물, 2005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010년 광양시 주최로 매천황현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사업이 추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매천집』. ; 『매천속집』. ; 『매천야록』. ; 『매천전집』.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 문일민,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원호회, 1956.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7·8·10권, 1970·1976·1978. ; 이은철, 『매천 황현을 만나다』, 심미안, 2010. ; 김항구, 「황현의 신학문 수용과 ‘호양학교’ 설립」, 『문화사학』 21, 한국문화사학회, 2004. ; 배종석, 「매천시(梅泉詩)의 의경(意境)-만수동(萬壽洞) 형상을 중심으로-」, 『한문학보』 23, 우리한문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