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필주 洪弼周

계몽운동 애국장(1990)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풍산(豊山)
이명(별칭)
자 : 사량(士良), 호 : 자은(紫隱)
출신지
충남 천안(天安)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훈격
애국장(1990)

주요 활동

1904년 일제의 황지개척권 반대 운동 참여, 1906년 대한자강회 총무, 1907년 을사오적 처단 계획 참여, 대한협회 조직, 1910년 이후 기호흥학원 초대 학무부장으로 활동

관련 사건

을사늑약

관련 조직

대한자강회, 오적암살단, 대한협회, 기호흥학원

생애

1857년 9월 7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풍세면(豊歲面)에서 부친 홍재모(洪宰謨)와 모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사량(士良)이며, 호는 자은(紫隱)이다. 일찍 사망한 숙부 홍가모(洪可謨)의 양자로 들어가 충남 아산군(牙山郡) 배방면(排芳面) 세교리(細橋里) 안골 마을로 이사하였다. 1892년 최시형(崔時亨)의 도학(道學) 경론(經論)을 듣고 동학에 입교하여 손병희(孫秉熙) 등과 교유하였다. 1893년 3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었던 동학의 보은집회에 참여하였다. 그해 9월 양모(養母) 진주유씨(晉州柳氏)의 상을 당하였으나 상례(喪禮)를 치르기도 전에 체포령이 내려져 두 아들과 조카를 데리고 강화도에 있는 친모의 외갓집으로 피신하였다. 1896년 3월 안동부사 이남규(李南珪)의 추천으로 안동부 참서관에 오른 뒤 안동군수·현풍군수 등을 지냈다. 1898년 민심을 안정시킨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올랐다. 1900년 12월 대구군수에 임명되었다. 현풍군수에서 대구군수로 옮길 때, 이기(李沂)가 한시를 지어 주었다. 군수 재직 당시 토지를 불법 구입하여 교당을 수축하거나 가옥을 임대하는 데 혈안이었던 일본인이나 선교사 등의 행위를 저지하고, 민생 안정에 힘썼다. 대구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만인산(萬人傘)을 받기도 하였다. 1901년 2월 칙임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낙심하여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사직하였다. 1904년 6월경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건하(李乾夏)·박기양(朴箕陽)·이범창(李範昌)·윤병(尹秉)·이기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고 수백 명과 연명으로 상소하였다. 또한 일제에 동조한 이하영(李夏榮)·현영운(玄映運) 등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규탄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많은 고초를 겪은 후 같은 해 9월 풀려났다. 1905년 6월 나철(羅喆)·오기호(吳基鎬)·이기 등과 함께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왕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라는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에서 한일 양국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과 한국에 대해서 선린의 교의(交義)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때 동지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독사진에 한시 한 수를 지었다. “나의 머리를 깎고 내 몸에 터럭 옷(양복)을 입으니 한 몸이 두 세상을 사는구나. 그 얼굴은 창백하고 그 마음은 우울하니 나와 항상 떠나지 않는 것은 천하의 근심이로다. [이발지치(爾髮之薙) 이복지계(爾服之罽) 일신양세(一身兩世) 기색창기기유(其色蒼其氣幽) 여이불상이자(與爾不相離者) 천하지우(天下之憂)]” 1906년 7월에는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대한자강회월보』에 「민공죽가(閔公竹歌)」·「공화기멸(空華起滅)」·「신학육예설(新學六藝說)」 등의 글을 기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민정신 계몽에 앞장섰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려는 의도에서 민영환(閔泳煥)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07년 3월에는 나철·오기호·이기 등과 더불어 을사5적이야말로 2,000만 민족을 노예로 만들고 국권을 농단한 자들이므로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권중현(權重顯)을 처단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모두 처단한 다음 친일정부를 전복하고 신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어서 을사5적 처단 계획을 수립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무기를 구입한 후, 수차례에 걸쳐 암살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번번이 실패하였다. 같은 해 헤이그특사사건으로 대한자강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장지연(張志淵)·권동진(權東鎭)과 함께 대한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일진회를 성토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협회보』의 편집과 발행인으로서 「빙집절략(氷集節略)」·「학교총론(學校總論)」·「인태양(人太陽)」 등의 글을 게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특히 「인태양」에서 “이제 20세기를 당하여 대한의 계선내(界線內)에 그 성(盛)하고 만족한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그 대요를 듣자면 애국정신이다. 비단 유식자만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식한 자도 역시 나라를 사랑한다. (중략) 뜻이 있는 애국하는 인사는 종교의 이동(異同)과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다만 우리 국토에서 나서 함께 우리 국어를 쓰며 우리 역사에 함께 할 자는 모두 다 함께 돕고 동정하여 한가지로 대업을 이루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의 주요 내용을 소개함으로 시대변화에 부응한 유연한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조완구(趙琬九)·강윤희(姜玧熙)·정영택(鄭永澤) 등과 제국신문찬성회(帝國新聞贊成會)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언론 활동도 병행하였다. 또한 기호흥학회 평의원과 총무를 역임하며 기호지방 근대교육 보급에 노력하였다. 1910년 6월 일본 도쿄에 재차 건너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등을 만나 한국침략을 통렬히 논박하였다. 그곳에서 리훙장(李鴻章)이 특파한 량치차오와 만나 일본의 식민정책 타도를 역설하였다. 1910년 이후 대한협회에서 설립한 기호흥학원(畿湖興學院, 현 중앙고등학교)의 초대 학무부장으로 취임하여 후진양성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대한협회보』. ; 『대한자강회월보』. ; 이기, 『海鶴遺書』. ;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紫隱先生遺事』, 탐구당, 1985. ; 대종교종경종사편수위원회,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7권,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