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강렬 片康烈

계몽운동 대통령장(1962) 내국인

인적 사항

생몰년월일
본관
절강(浙江)
이명(별칭)
호 : 애사(愛史), 이명 : 편강우(片康宇)·김범오(金範五)
출신지
황해 연백(延白)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훈격
대통령장(1962)

주요 활동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소모장·선봉장으로 활동, 1909년 평양 숭실학교 입학 후 신민회원들과 교류, 1911년 105인 사건 연루, 1915년 대한광복회에서 활동, 1919년 황해도 연백군 만세시위 참여, 1920년 황해도주비단 안악군 대표로 활동, 1923년 의성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

관련 사건

후기의병, 105인 사건, 1919년 연백군 만세운동

관련 조직

이강년 의병부대, 신민회, 대한광복회, 황해도주비단, 의성단

생애

1892년 2월 28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봉서면(鳳西面) 현죽리(玄竹里)에서 부친 편상훈(片相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절강(浙江)이고, 호는 애사(愛史)이며, 이명은 편강우(片康宇), 김범오(金範五)이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16세의 나이로 이강년(李康年) 의병장을 직접 찾아가 군사를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였다. 다시 선봉장으로 임명된 후 항일투쟁을 이어가다가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 부상을 당하였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09년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용하였고, 신민회원들과 교류하는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새로운 동지들을 만났다. 1910년 11월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신민회에 가입한 후, 황해도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3년 후 무죄로 풀려날 때까지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12년 부친이 운영하던 양진의숙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14년 선대가 세거하던 경상북도 금릉군(金陵郡, 현 김천)으로 이주하였고, 진목동(眞木洞) 당숙집에 거주하면서 서당을 운영하였다. 그러자 인근 청년 30여 명이 찾아와 수학하였다. 이때 경상도 지역 비밀결사단체 관계자들과 교류하였으며, 1915년에는 박상진(朴尙鎭)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가 와해된 후에는 다시 귀향하였다. 1919년에는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연백군의 만세운동은 같은 해 3월 15일 봉북면(鳳北面)에서 시작하여 3월 24일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형 편부열(片富㤠), 동생 편덕열(片德烈)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생 편덕열을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긴밀히 연락하였다. 1920년 초에는 신민회 회원이던 최명식(崔明植)·간명제(簡明濟) 등과 사리원에서 황해도주비단(黃海道籌備團)에 가입하고, 이후 안악군 대표를 맡으면서 주로 부호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는 동아일보사 해주지국 연안분국장이 되어 언론활동에도 참여하였다. 그해 8월 임시정부에서 국내로 파견한 김성규(金聖奎)에게 받은 『독립신문』 10여 장을 자택에 은닉한 일과 군자금 모금을 의뢰받았다는 이유로 친형 편부열, 신현기(申鉉琦)·김경태(金景泰)·김각배(金珏培)·장동한(張東翰)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20년 9월 22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을 받고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2년 1월 20일 만기를 채우고 풀려났고, 같은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1923년 7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양기탁(梁起鐸)·김이대(金履大)·백남준(白南俊) 등과 함께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이때 양기탁과 이동녕(李東寧)은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의성단은 창춘(長春)·지린(吉林) 등 대도시를 활동무대로 삼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파괴, 조선총독·관동장관 암살, 한국 내 관공서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주된 활동목표로 삼았다. 같은 달 본부를 이주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카륜(卡倫)으로 옮긴 후, 30여 명의 단원들과 함께 주로 친일파를 상대로 한 군자금 모집 활동과 국내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지린조선인민회장 김동우(金東佑)·부회장 문희원(文熙元)·전 부회장 김내전(金來全) 등을 통해 의성단과 단장 등의 활동을 정탐하였다. 그해 12월 초 단원 김선학(金善學)·곽도성(郭道成)과 함께 창춘의 김명제(金明濟) 집에 머물면서 이주 한인의 현황 등에 대한 기본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창춘 조선인민회장 김동만(金東晩)의 납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경고문을 2차례에 걸쳐 발송하였다. 12월 20일 김명제와 김이현(金利賢)에게 명하여 창춘의 이주 한인 상점에서 군자금 5,000엔을 모집하려고 하였지만, 두 사람이 모두 창춘경찰서원에게 붙잡혀 실패하였다. 12월 하순에는 단원 김이현의 체포가 밀정 함선재(咸善哉)의 밀고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단원 7명과 함께 밀정 처단을 시행하였고, 이어서 창춘의 관공서를 파괴한 후 시내에 친일행위에 대한 경고문도 부착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창춘 조선인민회장 김동만과 부회장 오태순(吳泰淳)을 사직하도록 하였다. 1월 20일 의성단 외교부장 한형기를 비롯하여 단원 20명과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통신부장 김의선(金義善), 교민단 대표 신익수, 지린주민회장 이관일, 농무회 대표 장상우(張相友) 등과 회합하고, 독립운동단체 통일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러한 통합 노력은 1924년 3월 의성단·군정서·지린주민회·광정단·대한독립단·대한통의부·노동친목회 등이 참여한 전만주통일의회주비발기회(全滿洲統一議會籌備發起會) 개최로 결실 맺게 되었다. 결국 같은 해 11월 24일 의성단을 포함한 8개 단체가 정의부로 통합하기로 합의한 후, 1925년 1월 15일 의성단을 해체하고 정의부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통합 과정에서 의성단에 잠입하여 밀정 활동을 하던 승정윤의 밀고로 1924년 7월 24일 하얼빈에서 붙잡혀 8월 22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같은 해 9월 27일 신의주지방법원 제1회 공판에서 통일발기회를 개최하고 희생정부를 옌지현(延吉縣) 룽징(龍井)에 설치하여 독립운동의 취지를 선전하는 동시에 폭탄으로 각 지역의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자 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때 이희적(李熙迪)·허헌(許憲)·최진(崔鎭) 등의 변호인들로부터 무료변론을 받았다. 제2회 공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불복해 항소하였지만, 1925년 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다시 7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3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평양형무소에서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어 독방에 수감되었고,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인후병·폐렴·결핵·척수염 등을 앓았다. 결국 척수염이 악화되어 1927년 4월 15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평안북도 선천(宣川)의 미동병원(美東病院)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1929년 1월 16일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丹東市)]에 거주하던 친형 편성렬(片成烈)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 줄 것이요.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유해는 안둥현 금강산(錦江山)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976. ; 『동아일보』, 1928. 9. 8. ; 김후경,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광복출판사, 1983.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 1986. ; 채영국, 『한민족의 만주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00. ; 박경, 「편강렬의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5.